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58: 믿음에 대한 오해와 진실 - 누가복음 17장 1-10절

차작가 2023. 11. 13. 12:40

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절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절 만일 하루 일곱 법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쁘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 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절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도입:

제목:누가 날 좀 구해줘요

한 여행자가 그랜드캐니언 가장자리에 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굴렀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는 간신히 매달렸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줘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여기 있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이다." "당신이 거기 계신다면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구해 주마.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주님,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 아니라 새벽 기도회에도 나갑니다. 헌금은 몇 달러씩 합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다.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 "제가 얼마나 당신을 많이 믿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좋아! 그렇다면 네가 붙들고 있는 그 나뭇가지에서 이제 손을 떼거라." 그러나 그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이렇게 절규하며 부르짖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 없소!"

본문 해석:

1. 본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인간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1절: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인간관계에서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거나 누군가로 인해 실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새겨 두어야 할 것은 나 또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한다)

비록 타인과 인간관계가 좋고 성격과 인격이 훌륭하다고 해도 나로 인해 누군가가 실족하는 일이 분명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연자 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정도의 심각한 죄를 범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3&4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러한 용서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 실천을 강조한 것 보다는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횟수로 고정된 용서가 아니라 끊임없는 용서를 의미한다. 즉 형제가 나에게 계속해서 죄를 범한다고 해도 신자에게서 나올 것은 용서뿐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2. 제자들이 5절에서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한 이유?

1~4절:

인간은 실족케 하는 존재이고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또한 용서가 불가능함을 알고는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하고 있다.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것은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주십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은 믿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더 큰 믿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말씀한 용서를 실천하여 예수님의 제자다운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자가 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은 믿음을 용서를 실천하게 하는 능력으로 생각한 것이다.

3. 제자들의 이 요청에서 우리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과연 더해 질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믿음이 증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믿음을 양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믿음이 많고 적음을 생각하고 따진다. 믿음이 많은 사람과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구분도 한다. 하나님의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큰 믿음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큰 일과 작은 일로 구분하는 것부터 세상 기준에 붙들려 있는 잘못된 생각임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요 6:29)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이미 참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가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의 크기에 따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일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믿음을 오해했다. 이들 역시 큰 믿음, 좋은 믿음을 가시적인 것으로 차별했다. 일반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른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믿음은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믿음을 더하려고 노력도 한다. 정성도 드려보고 시간도 드리기도 한다. (‘믿음은 내 하기 나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뜨거운 믿음이 되기 위해 기도원을 찾아가고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하며, 게으르지 않는 믿음이 되기 위해 교회 일에 열심을 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믿음이 더해 지는 걸까?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을 생각하면서 우리 신앙생활에 적용도 해 본다. 지극정성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감동 받아 믿음을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대 우리의 이런 노력을 통해 정말 믿음을 더할 수 있을까?

4.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자. 다는 살펴 볼 수 없고 몇 사람만 살펴 보자.

1)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게 된 것도 자기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신 그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도록 만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까지 바칠 수 있는 아브라함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당연하다.

2) 모세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라는 말은 믿음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과 모세는 애굽을 떠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과연 왜 믿음이 개입되지 않으면 애굽을 떠나지를 못할까?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의지로는 애굽을 떠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외부의 힘, 믿음이 개입하여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내린 결론은 어떤 믿음의 사람도 자신의 노력으로 믿음을 더해진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5. 그럼, 이렇게 인간의 노력으로 절대 더해 질 수 없는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6절에 나와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 If you have a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믿음은 많고 적음인 양의 문제가 아니라 소유의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을 많고 적음으로 이해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낸다.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믿음이 있지만 더 큰 믿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말씀한 것을 실천하여 제자답게 되 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는 능력을 행했어야 한다. 그 일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은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6절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도 믿음이 없는 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다만 그 믿음을 뜨겁게 만들고 부지런한 믿음이 되게 하면 능력이 나타날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참된 믿음에서 벗어난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 믿음을 우리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을까? 아니오 믿음은 주어진다.

6.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라는 성경 구절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서만 주어지는 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백성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그래서, 믿음이란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겨자씨 만한 믿음도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리고 뽕나무더러 뽑혀 바다에 심길 분은 예수님이라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7. 믿음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어떤 일(용서했다는 것등)을 행했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예로 수종드는 예를 들어 주심.

7~10절 설명

예수님은 이것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말씀하신다. 종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와 앉아서 먹으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주인이 먹을 것을 준비하게 하고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게 한 후에 먹고 마시게 한다. 또한 주인이 명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는 일은 없다.

종이 밭에 나가서 종일 일을 했다고 해서 집에 돌아오면 주인에게 상을 받고 대접 받는 것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주인을 위해 수종을 들고 일을 해야 한다. 주인을 위한 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먹고 마실 수 있다. 배고프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없다. 이렇게 온 종일 주인을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도 없다. 이것이 종이다.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였다. 그래서 종은 무슨 일을 했다고 해도 주인에게서 그 대가를 받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주인과 종의 관계를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야 할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10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여야 한 것을 했을 뿐이라는 이 종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무익한 종이라는 것은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종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무슨 일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종의 자세이다.

성도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무익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크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믿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는 도구였을 뿐이다. 믿음을 빙자해서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붙들고 있고 존재케 함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무익한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앞서 살펴 본 믿음의 사람들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아들을 바칠 수 있었다고 하지 않았고 모세도 자신의 믿음 때문에 애굽을 떠나고 바로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마 17:2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역시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게 되면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긴다는 것은 내가 믿음을 가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믿음의 주체를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능력이 된다. 이것이 믿음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그래야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10절)는 말씀처럼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살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기 때문에 ‘무익한 종’의 자세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일도 하나님의 능력이 하게 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신을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죄인입니다’‘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조차도 말씀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것과는 비할 수 없는 능력과 기적의 세계를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