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57: 무엇보다도 소중한 예수 - 마가복음 14장 3-9절

차작가 2023. 11. 13. 12:38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절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으니라

7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해석:

본문의 이야기는 마태, 요한복음에도 기술 되어있는 내용이다.

1. 이 사건의 시간 및 장소

* 시간:

1) 요 12:1에서 ’유월절 엿새 전’으로 기록 (시간에 따라) 되어있다.

2) 예루살렘 입성 바로 전날이다.

* 장소:

1) 3절 에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임을 알 수 있다. 베다니는 (요12:1)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다.

2) 나병환자 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것은 시몬은 이미 나병이 나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시몬은 누구인가? 나사로가 있는 곳에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오늘의 주인공인 한 여인은 누구인가? 요 12:3에서 마리아로 기록되어 있다. (마, 막 기록에는 무명으로 되어 있는데 기록 당시 마리아가 살아 있어서 그렇게 기록한 거고 (96년 정도에 기록된 ) 요한복음에서는 실명을 거론한 것은 마리아가 죽고 없었기 때문이다. 시몬은 나사로 집안 사람인데 마리아의 아버지 혹은 마르다의 남편으로 추정된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사건 발생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초청 받아 식사 하는 자리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이다.

우리에겐 이상하겠지만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집에 온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조금 붓는 것은 전통적인 관례였다. 머리에 향유를 조금 부으면 그 향기가 집안 가득하게 해서 분위기를 좋게 조성했다.

그런데 마리아는 보통 관례와는 다른 행동을 해서 주위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왜냐면 나드 한 옥합을 깨트려 그 전부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는 발까지 부어 자기 머릿결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향유가 굉장히 비싸고 귀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스파이크 나드라고 하는 향유는 히말라야 지역에서 주로 나며 인도에서 수입한 것이다. 향기가 좋아서 굉장히 귀하고 값이 비싸서 서민들은 가질 엄두도 못내는 것이었다. 한 나드가 얼마나 비싼지 300데나리온이라고 나오는데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면 거의 1년 치 노동 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60X300=$20,000정도) 이 나드는 보통 알라바스터라는 목이 긴 용기에 보관하는데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렸다는 것은 바로 긴 목 부분을 깨트려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전부 사용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그럼, 마리아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먼저 마리아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 나사로와 마르다의 여동생이다. (요한복음)

- 죽었던 나사로 가 살아 난 것을 직접 목격했고 오늘 잔치가 열린 집 주인인 시몬의 문둥병이 나은 것을 체험했다.

- 분주한 언니 마르다와는 달리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는 good listener였다. 누가복음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런 마리아를 이해하면 비싼 향유를 전부 부은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A. 치유의 경험(나사로와 시몬)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나사로 에 대해서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오빠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직접 목격했다) 또한 성경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시몬의 나병도 나았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이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굳게 믿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에게 있는 가장 비싸고 소중한 것을 가지고 나와서 그 것을 아낌없이 주께 부었다. 그래서 8절에 힘을 다하였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 감사의 표시와 존경의 표시로, 그리고 절대 순종의 표시로 그 발 앞에 꿇어 앉아 자기의 머리를 풀고 그 머리를 이용하여 향유를 발랐다고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서 머리를 푼다는 것은 ‘나는 부정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다.(민 5:18) 그리고 누군가의 발 앞에 앉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절대 복종을 상징한다.

B. 말씀을 잘 경청함으로써 제자들 보다도 더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을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막 8:31 역시 비슷한 말씀)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비싼 향유 전부를 부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6절에 좋은 일, 8절에 장례 준비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6절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를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과연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이 어떻게 예수님께 좋은 일이 되는 것일까?

8절을 보면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보면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타내고 부각시키는 것으로 보셨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향유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붓는 것이었다.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도 될 정도로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임을 드러내는 것이 향유가 의미 있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여인의 행위를 예수님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성도의 헌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 쓰시라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은 헌신이요, 헌금이다. 봉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이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그가 부은 향유가 값비싼 것이어서도 아니고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부어서도 아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모습으로, ‘진정한 헌신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헌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헌신을 하고,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선교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있고, 나도 그 죽음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드려져야 한다. 참다운 헌신은 ‘내가 주님께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을 보태드립니다.’의 차원이 아닌 주님의 은혜로 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엄청난 사건이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제물로 바쳐지신 그 하늘의 제사에 내가 깍두기로 참여하게 되는 사건이 우리의 헌신이요, 헌금이요, 봉사요, 선교요, 구제요, 예배요, 선한 삶이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가 바로 그러한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한 복음을 이해한 자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300데나리온이 아니라 3000 데나리온 짜리 향유라도 기쁘게 드릴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존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나타내는 마리아의 행동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때문에 예수님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억되어야 할 마리아가 행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왜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일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 된 우리에게는 새롭게 사는 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일이다.

4. 이런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리아를 비판함

4&5절에서 유다(요한복음)와 제자들이 비판했다.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

제자들의 분개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해도 향유는 땅에 흘러 내려 다시는 못쓰게 된다. 비싼 향유를 그렇게 허비하는 것보다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게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도 다르지 않다.

윤리를 기준 한다면 제자들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사랑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으로 판단한다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광신일 뿐 바람직한 행동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향유를 부어서 허비해 버리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사용하면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이니까 분명 더 효율적이고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여 가치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이 더욱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는 생각에 의한 판단일 뿐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를 비난한 사람이 가롯 유다라고 하고 그 유다는 도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말 속에는 그 돈으로 자기 유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겉으로는 남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제는 자기 유익을 챙기려고 했기에 그는 도둑이었다.

여기서 마리아와 유다의 가장 큰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의 전부를 맡길 정도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반면에 유다는 예수님을 종의 값과 같은 가치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과 극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그 중심에는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육신의 유익을 근거로 해서 바라보느냐’라는 중대한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5. 이렇게 제자들에게 상처 받을 마리아를 위해서 예수님이 변호 하심

결론

9절에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복음을 전파할 때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그 행위까지 함께 가르치라는 의미이다.

마리아가 보여준 행동은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 향유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마리아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예수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심을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삶이 그 무엇도다 예수님을 가장 소중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예수 하면서 돈을 더 아까워한다면 그것은 진실된 믿음이 아니다.

유다는 마리의 행위에서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돈을 봤다. 평소 돈을 더 소중히 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돈을 훔쳤던 것이고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향유가 허비되는 것만 봤던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은 예수님이시다. 돈이 우리를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사망에서 일으키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건져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보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소중히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돈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 분임을 증거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까울 것이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비싼 향유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쁨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향유를 부은 행위로 보여준 것처럼 돈을 가지고 있는 기쁨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기쁨을 보여줘야 한다.

마리아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행위에서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보인다. 그것으로 인간에게서 가장 낮다고 할 수 있는 발을 씻기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낮은 자이고 반면에 예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보여준다. 마리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 과연 지금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