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60:구원의 비밀 - 마태복음 25장 31-절

차작가 2023. 11. 13. 12:44

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절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절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절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절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절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절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절 저희는 영법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본문 해석:

1. 예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목적은?

현실에서의 복과 심판이라는 미래에서의 구원, 이것이 신앙의 목적과 이유가 아닌가?

이런 사람이 본문을 이해한다면, 양이 왜 오른 편에 있게 되었는가에 중점을 두면서 선행을 베풀되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잊어버려야 한다는 교훈적 의미를 찾아서 그대로 실천하자는 내용으로 이해하지 않을까? ‘칭찬 받은 양처럼 행하여 우리도 염소가 되지 말고 양이 되자’는 것이다.

하지만 양과 염소는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은 양으로 태어났고 염소는 염소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자기 의지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양은 처음부터 양이고 염소 역시 처음부터 염소일 뿐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구원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자기 구원을 위해 뭔가 행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헛된 일에 지나지 않는다.

2. 대개 보면 심판을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해서 신자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비유는 그러한 의미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보면 심판은 구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심판은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한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것은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구분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목자 되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심판이다.

3. 34절에 보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고 말하고 있다.

임금의 오른 편에 있는 자가 받을 복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창세로부터 예비된 복이라면 오른 편에 있는 양은 이미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로 선택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것을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라 한다. (우리가 지금 밤하늘에서 보는 북극성의 반짝이는 빛이 680년 전에 떠난 빛인 것처럼 우리가 지금 겪는 현실 또한 수천 년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출발한 진짜 현실의 실제화 현장일 뿐이다. 따라서 성도의 현실은 지금 그들이 사는 일상이 아니라 이미 완료가 된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 그게 현실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에 있을 양과 염소의 구분은 그동안의 행실이나 신앙을 기준으로 해서 복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복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선택되어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실행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창세전부터 오른 편에 세움 받을 자로 선택된 자가 있고, 그가 어떻게 살았든 그 삶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면 인간에게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항변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타당하다고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시고 구원된 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이것이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성도는 자신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양과 염소는 처음부터 양이고 염소였다. 염소가 최고 수준의 선행을 하고 많은 실천을 했다고 해도 양이 될 수가 없고 양이 잘못을 범한다고 해서 염소로 바뀔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마음대로 살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양입니까? 아니면 염소입니까?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도 모르고 여러분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으니까 양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고 기대일 뿐이지 양과 염소의 구분은 오직 목자에 의해서만 된다.

그래서 본문의 비유는 ‘양은 이런 일을 한 사람이니까 우리도 양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양이 되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아버지께 복 받을 자로 택함 받은 성도의 사람됨이 그 행한 바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한다.

 

◉ 지극히 작은 자 ◉

35,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만 보면 양은 곧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든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0절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위의 본문은 우리가 이해하는 선행과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든 자를 예수님 자신으로 얘기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지신 고난과 핍박의 길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환대하는데 예수님 스스로 고의로 그 같은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별 볼일 없는 자가 자신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을 고난과 핍박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참된 신앙의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이 곧 믿음이 이끄는 길임을 시인하며 그 길로 인도 받으며 견디고 인내할 수 있기를 소원하게 된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고, 이 앎과 신앙은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를 어떻게 대하는 가로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지극히 작은 자’는 복음으로 목말라 하며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를 의미할 수 있다. 복음을 좇고 복음으로 살고자 하며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은혜의 복음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세계관은 어떠해야 할까? 바로 그러한 연약한 모습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선물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나 형제의 삶 속에서 그러한 연약한 모습이 발견될 때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추악함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더러움을 짊어지고 가실 수밖에 없었다는 은혜의 복음을 다시 한번 명료하게 반추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 은혜의 위대함을 교훈하시기 위해 성도의 삶 속에서도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때때로 폭로시키시는 것이다. 그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달으면 된다. 그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나 혹은 이웃 속에서 발견이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떠올리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을 대접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오른 편에 세움 받은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절)로 시작하여 자신들이 주를 위해 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가 있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영접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성도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의도적이 아니며 의식적이지도 않고 내 안에 자리한 복음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와지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저들을 영접한다’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 복음이 이끄는 바대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이렇게 했다’고 하실 때 ‘제가 언제 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라고 항변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를 위해 행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자기들의 행함을 무시하고 부인하자 항변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불렀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참되다 할 수 없으며 자기 구원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거짓된 신앙인이었을 뿐이다.

◉ 복음 안에서라는 관계 ◉

이런 사람들은 잘 살면 복 받은 것이고, 예배당 건물 크게 지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로운 교회라고 생각한다. 핍박은 북한 같은 곳에서나 해당되는 말이지 지금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교회가 복음 때문에 함께 하는 관계라는 것도 염두해 두지 않는다. 다만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형제에게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자기 평안이 중요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부인당하는 것을 참지를 못한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에 ‘우리가 언제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며 자신들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복음은 성도를 고난으로 이끌어 간다.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가신 길은 보면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성도로 함께 하는 우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며 다른 지체가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에 함께 할 관계에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고난에 대해 비웃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한다면 우리의 성도 됨은 지극히 작은 자, 즉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며 그 길에 함께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신다.

양들은 모든 상황과 현상과 사건과 인간들 속에서 항상 예수를 읽어낸다. 그리고 그 예수에 의해 거저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 신랑에게 집중하여 살게 된다.

그들은 연약한 자들 속에서도 예수를 발견하고, 실패 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한다. 그들의 삶의 관심은 전부 예수요, 은혜뿐이다. 그들이 종말을 준비하는 양들이다.

결론: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해 예수 믿는 것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희망의 중심에는 역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다. 성도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나에게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이어서 섬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스러워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편 60편까지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당부드린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양됨과 염소 됨을 바꿀 수 없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