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예수님을 만난 동방박사들 - 마태복음 2장 1-9절

차작가 2023. 11. 24. 12:51

동방박사를 생각하면 낙타를 타고 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아니면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 앞에 엎드려 귀한 예물을 바치며 경배하는 모습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카드에 등장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성탄절에 교회에서 말하는 동방박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멀리서 별을 보고 아기 예수를 찾아와 그 앞에 엎드려 귀한 예물을 바치며 경배하는 동방박사를 얘기하며 우리 역시 귀한 예물을 바치며 예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동방박사의 등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큰 소동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을 보면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고 말한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의 반응은 소동 자체였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헤롯이 아기 예수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대적이라며 동방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기를 자세히 묻고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아기를 다 죽여 버리는 참극이 발생했다. 이처럼 동방박사의 등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평화가 아니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박사들을 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헤롯을 만나게 하셨을까? 그로 인해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아기들이 죽지 않았는가?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박사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신 것은 단지 경배가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경배가 목적이었다면 헤롯을 만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예루살렘은 헤롯을 왕으로 섬기면서 나름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서 박사들이 등장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음으로써 헤롯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기존의 세상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에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고 유대인들은 헤롯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기존 세상이었다.

그런데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었다는 것은 지금 유대인들이 섬기고 있는 왕은 왕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헤롯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왔던 유대인들의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박사들의 물음은 기존의 세상을 부인하고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헤롯도 예루살렘도 소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소동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예수를 믿으면 마음에 평화가 온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며 예수님의 다스림에 순종한다면 예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필히 있어야 할 것은 자기 세계의 무너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기 세계가 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자기 세계가 있는데 그러한 세계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꿈꾸는 자기 세계의 왕은 항상 자기 자신이다. 다른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는 세계를 꿈꾸고 원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겠나?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너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묻는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물음은 너에게는 왕이 따로 계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나의 왕이 되어서 나를 위해서 살아왔던 기존의 세상은 참된 세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물음 앞에서 조용할 수 있을까? 우리의 속은 예루살렘처럼 큰 소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헤롯을 왕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기존의 세상을 향해서 메시아라는 참된 왕이 다스리는 새로운 왕국이 도래했음을 선포하기 위해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셔서 헤롯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원할까? 성공한 사람으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세상을 원할까? 설사 그러한 세상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것이 여러분께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생토록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죽으면 끝이다.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한다. 현실에서 누리지 못한 세상을 드라마를 통해 주인공의 세계에 빠져 들어 드라마와 함께 울고 웃으면서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드라마의 결말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끝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드라마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가 끝났을 때 크게 아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세계는 말 그대로 허상이다. 드라마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이 세상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쓰신 각본대로 움직여 가다가 각본의 마지막에 도달하면 끝나고 사라져 버릴 세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유대인의 왕이 오셨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이 세상은 끝남이 없이 영원히 계속될 생명의 나라이다. 바로 이 나라가 도래했음을 동방 박사를 보내서 선포하신 것이다.

아담의 죄 이후로 세상은 사망의 권세에 장악되었다. 그 누구도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고 죄 아래 붙들려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 악한 죄의 땅에서 우리가 겪는 것은 모순과 왜곡과 갈등과 다툼 밖에 없다.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 인해서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여러분이 기대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희망일까? 우리에게 희망은 죄악의 세상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왕으로 오신 예수님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기존에 내가 꿈꾸고 원하던 세상의 무너짐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 아니다. 모두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허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세상만이 영원함을 알아야 하고 그 세상을 소망해야 한다. 신앙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신분이나 위치가 영원토록 예수님 안에 속하게 되었고 또 그것은 결코 변함이나 취소가 없다는 것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들이며 하늘의 영원한 것을 상속받을 존재라는 것에 확고하다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대한다고 해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의 그 이름은 이미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도 어떤 비방이라도 신자의 신분을 흔들 수 없음을 믿기에 당당하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이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별을 띄워서 박사들을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다. 박사들은 하늘에 뜬 별을 따라서만 움직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고 경배 드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인도하는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별을 따라서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별이 인도하는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그 별이 무엇일까? 결국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참된 세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신자는 그 말씀의 강력한 힘에 붙들려서 기존을 세상을 벗어나 예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동방박사는 크리스마스카드에 금박으로 치장되어 박혀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방박사는 찾아 와야 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너희의 왕은 어디 계시뇨’라는 물음을 동일하게 받아야 한다. 이 물음이 우리로 하여금 과연 예수님이 나의 왕으로 내 안에 자리하고 계시는가는 확인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신자로서 과연 어떤 세상을 원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이 왕이 아닌 사람은 그 어떤 선하고 의롭고 착한 모습으로 세상의 칭송과 존경을 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사단에게 장악된 사단의 자식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왕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신자에게는 항상 있어야 할 질문이고 그 질문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현재 실상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박사들의 질문에 대해 헤롯은 대세자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 5:2절에 있는 예언을 따라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답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왕에 대해 예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언은 그들의 마음을 붙잡고 인도하는 강력한 능력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의 머리에 담겨 있는 지식에 불과했다.

이것이 박사들과 다른 점이다. 박사들은 하늘에 뜬 별을 하나님의 예언으로 간주하고 그 별을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을 만났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알고 있던 예언의 말씀도 그들을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을 말씀을 알고 있었을 뿐 인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참된 예언은 우리를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게로 인도한다. 그리고 그분께 경배하게 한다. 기존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고 그 세상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참된 예언이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신학에 박식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예수님에게로 인도 받으면서 새로운 주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다. 헤롯이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당부했다.

헤롯의 의도는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헤롯은 애당초 왕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줄 의도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성경에 예언된 왕의 등장으로 인해서 자신의 왕권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예수를 찾아 죽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권세와 자리에만 집중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이다. 우리고 세상의 이러한 사고방식 그대로 예수님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 왕의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이루고 그 세계를 살고 싶은 욕망으로 예수를 찾고 그 앞에 머리 숙이는 것이 우리의 실체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악의 세력이다.

결국 하나님은 동방박사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고 헤롯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세상이 가지고 있는 악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안에서 동방박사를 만나고, 그들의 물음을 대한다면 예루살렘과 헤롯처럼 우리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이것이 곧 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왕이신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게 되는 것은 생명과 사망으로 나눠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동방박사를 인도한 별이 우리 앞에 떠 있다. 그런데도 아무런 생각 없이 돈 벌고 자식 잘되면 행복한 인생이라며 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인가?’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박사들을 인도한 별을 우리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직 별을 따라 움직이며 결국 예수님을 만난 그들처럼 우리도 별을 따라 움직이면서 생명이시고 왕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존의 세상이 헛됨을 알고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소망하고 새로운 나라로 굳건히 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