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말씀은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에서 말씀은 곧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개념이 나온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는 세 인격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 각분은 동등하게 하나님이시며 모든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하신다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서는 삼위 하나님 전체가 관여하시되 그 역할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의 구원을 예정하셨다.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 가셨다.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 계셔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의 최종적 구원을 보증하신다.
본문에서 그 말씀은 제 2위격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다. (모든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아님) 그냥 사람의 모양을 입은 것이 아니라 완전 사람이 되셨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이 쉬울까? 그 크신 하나님이 이 작은 인간의 몸으로 된다는 것이 쉬울까?
그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먼저, 구약시대 때 이미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경우가 아래의 말씀과 같이 많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천사 셋을 영접한 사건:
창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18: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18: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야곱이 천사와 씨름 한 사건:
창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32: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불에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을 때:
단 3: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실 성육신에 관한 내용은 이미 성경에 예견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메시아(예수님)가 한 여자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동정녀 탄생을 암시한다. 이 예언은 하나님이 친히 주셨고 처음으로 선포된 복음이었다.
창 3:15 내가 너(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주전 700년 경에 이사야는 예수님이 어떻게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실지 정확히 예언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약속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 마리아가 기적을 통해서 임신하게 됨으로 실제로 이루어졌다.
예레미야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즉, 유다 지파에서 올 것을 예언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예수님의 성육신 시기에 대해서 주전 400년 경에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여기서 말라기 선지자가 말한 사자는 곧 새 언약을 가져 올 예수님의 성육신을 위해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 이었고 그가 말한 주는 곧 주 예수그리스도였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파괴 되므로 주전 70년에 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성자 하나님이 왜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 했을까?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1)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육체는 한번 죽어버리면 끝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2)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죽음에서 건져내시려고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 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구원이란 사탄의 올무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도 중요하지만 건짐이 필요하다.
그럼, 어떻게 건짐을 받을 수 있는가? 값을 치르면 된다. 그런데 그 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죄가 없어야 한다.
둘째: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생명이 다시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조건을 만족할 수 없다. 오직 예수만이 가능하다
이 본문 처럼 인간의 운명과 처지를 생생히 표현해 주는 말씀은 없다. 즉, 모든 인간은‘한평생 죽는 것이 무서워’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산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이다. 사람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죽을 때 까지 종노릇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즉,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는 마귀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인간을 다 버리셨을 때 영적 사망이 오게 되었고 마귀가 우리의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풍습이나 제도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고, 특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죄짓도록 충돌질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마귀는 우리를 지배할 모든 권한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귀는 단 한 사람도 지배 할 수 없게 되었다. 단지 마귀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여 아직도 지배하고 있다. 그런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마귀는 또 도망을 가게 되어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 주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온 세상을 가두고 있는 수용소의 철조망이 무너지게 되었다. 모세의 지도 아래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200만 명이 아니라 온 세상을 가두고 있는 마귀의 철망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제는 누구든지 마음껏 하나님께로 돌아 올 수 있다. 오늘날은 위대한 해방의 시대이다. 누구든지 죄에서 해방될 수 있고 미신에서 해방될 수 있다.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체험하심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기 위해서
히 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구약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자격은 반드시 이스라엘 형제 중의 한 사람이어야 했다. 천사는 절대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죄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아는 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만 용서 받는다고 해서 죄를 더 이상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꾸 죄를 짓는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다 해결해 주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많이 받으셨으므로 우리를 도울 수 있으시다. 우리가 시험을 당했을 때 얼마나 두려워하고 얼마나 염려하며 비겁해지는지 다 알고 계신다. 그러기에 어려운 시험에 빠졌을 때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특히 우리를 위해 기도로써 도와 주신다.
많은 경우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는데 이상하게 너무나도 잘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내 편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가장 막강한 내 편이 계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5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에게는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신다. 우리 약함을 아시고 우리 무지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계신다. 이 사실이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서 있는 우리, 힘겨운 세상 속에서 무력감과 왜소함을 느끼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이 예수가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구주 되신다. 우리는 바로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이다. 바로 그를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 중에 그가 모르시는 것이나 겪지 않으신 것, 공감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우리 앞에는 알 수 없는 미래, 불확실한 미래가 펼쳐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시고 승리하신 예수와 힘께 겪고 있다.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시며 권능의 손으로 능히 잡아 주시는 영광의 주를 의지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할지를 생가해 보자.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들어 오시기 위해서 하늘을 떠나신 것 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단순히 자신과 성별, 인종, 소득 수준, 국적 등이 같은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다른 곳으로 언제든지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지만 전혀 죄를 짓지 않으신 것처럼 악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따라가거나 묵인하며 동참하지는 않아야 한다.
예수님이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가야 한다.
성육신을 제대로 아는 성도들은 겸손한 삶을 살게 되어있다. 예수님께서 겸손한 삶을 사시고 겸손한 일을 하시기 위해 영광스러운 상태를 기꺼이 떠나셨은즉 우리는 개인적인 영광과 출세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 보다는 복음을 다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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