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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 누가복음 4장 16-21절

차작가 2023. 11. 26. 11:46

도입: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라신 곳인 나사렛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셨는데 그 말씀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 61:1,2 절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누구신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을 보면 예수님은 선지자의 예언을 읽음으로써 예수님이 곧 선지자가 예언한 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메시아 이심을 증거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 61;1,2절에서의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그리고 눌린 자 등은 사회적인 약자들인데 예수님이 과연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오신 것일까?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원자임을 생각해 볼 때 가난하지 않고 눈이 멀지 않고 눌린 자가 아니라고 해서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는 사회적 기준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예수님은 이 땅에 어떤 목적으로 오셨는지를 생각해 보자.

본문:

A. 먼저, 18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가난은 가진 것이 없어 삶이 황폐한 상태이다. 따라서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돈이지만 예수님은 복음(good news-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고 하셨다. 이 말은 복음이 가난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는 뜻이 된다. 복음으로 인해서 벗어 날 수 있는 가난이라면 그 가난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 즉, 영적 가난을 뜻한다.

아모스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암 8:11) 는 말을 하셨다. 이처럼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에서 벗어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문제는 우리가 말씀의 기갈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질이 없는 형편만 생각하고 물질만 갈급해 할 뿐이지 말씀이 없는 기갈의 상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 갈급해 하지도 않는다.

그럼 말씀으로 부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씀으로 부요하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자주 듣고 성경 공부에도 열심히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으로 부요하다면 세상의 부요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고, 재물에 자기 인생을 맡기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 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하는 부자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이 없어서 말씀에 부요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부요에 갈급해하고 마음을 뺏긴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우리를 부요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가난을 아는 신자는 자연히 복음을 갈급해하며 말씀 앞에 나오게 된다. 말씀으로 부요한 신자가 세상에 대해 자유 할 수 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천국이다. 말씀을 듣고 있다면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B. 포로(captive) 된 자에게 자유를 (proclaim freedom)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로 붙들린 상태는 우리가 죄에 결박되어 끌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 포로에게 가장 희소식은 무엇일까? 전쟁이 끝나는 것이다.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죄의 포로가 된 우리는 죽지 않고서는 해방될 길이 없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에 결박되어 전혀 소망 없는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 자유를 주셨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말한다. 신자는 더 이상 죄에 결박되어 사망으로 끌려가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은 죄에 결박되어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 같은 실상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 도덕과 윤리와 양심으로 죄를 이기고 선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죄에 강력하게 결박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실상이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망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죄에 결박되어 끌려가는 실상에 대해 눈이 뜨인다면 예수님이 해방자 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누가복음 13: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귀신이나 질병에 포로 된 자들도 자유롭게 하신다.

C.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recovery of sight) 함을 전파하며

눈 먼 자도 신체적 소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 눈이 먼 것이다. 신자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다면 보이는 세계에서 자유 할 수 있다.

보이는 세계보다 영적인 세계에서 보게 되는 것들이 더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살아가는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고,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신앙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가끔 보면 영안을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신비주의 이단이 생기는 것이다. 영안이란 ‘신기한 것을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보는 눈’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과 손길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려는 것이 영안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무엇일까? 그 핵심은 바로 십자가와 나눔이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보는 삶이 영안이 열린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나누려는 삶이 영안이 열린 삶이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내 뜻대로만 살았었다. 모든 것을 결정할 때도 내 뜻대로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 뒤로는 십자가를 생각하며 항상 내가 죽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영안이 열린 사람이다.

예전에는 나누지 못했다. 항상 내 중심이었고 나누기에 인색했다. 그러나, 예수를 안 뒤로는 남을 위해 내가 가진 것 일부를 이젠 나누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려는 사람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를 만나 주므로 일어났다.

recovery of sight =>시력을 회복시킨다. 원래는 하나님의 뜻에 사는 존재였다. 다시 그런 존재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자연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영적인 법칙을 이해한다.

D.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release the oppressed-현재 진행형)

눌린 자는 당시 노예와 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노예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을 누르고 있는 주인의 뜻과 생각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자기의 주체로 살아갈 수가 없다.

조현아의 땅콩 리턴 사건을 보면 어떤 사람이 억눌린 사람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무장이다. 아랫 사람한테 지적 받는 꼴이 되니 무안해서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초유의 사건이다. 온 세계 비방 거리가 된 사건이다. 갑이 시키면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을이 바로 억눌린 자의 모습이다.

인간의 삶이 이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형편에 의해 눌린 채 살아간다.

로마 황제의 평균 수명은 35세, 중국 왕들의 평균 수명은 36.7세, 조선 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3.3세로, 왕들이 모두 단명했다. 최고급 음식과 최고의 보약을 먹는 왕들이 장수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근심, 걱정,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절망하고 좌절하여 마음뿐 아니라 육체도 병들게 되어 암, 심장병, 당뇨, 신장병, 고혈압 등의 병이 생겨난다.

마음에 눌린 사람이 많다. 기쁨과 평안이 없다. 그래서 때로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런 분들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마음에 눌린 것들을 다 주님께 맡기라고 하신다. 주께서 relaese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억눌릴 때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공중 권세 잡은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억눌리게 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떠나게 하고 병들게 하고 가정에서 행복을 빼앗으려 하고 인간관계를 깨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에게 눌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왔다고 선포 하셨다. 마귀에게 억눌릴 때 마다 주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주님께서 반드시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

E.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은혜의 해는 구약 당시 ‘희년(Jubilee)’을 뜻한다. 레위기 25장에 등장하는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즉 50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희년이 되면 종들이 해방되고 가난 때문에 팔았던 땅도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각기 수에 따라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을 때의 원상태의 되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희년의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복음 아래서는 종도 자유를 얻는다. 즉 종과 상전의 관계가 사라진다. 가난한 자도 부요하게 된다. 복음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때문에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신자가 부요한 자로 주께 나오게 된다. 이 은혜의 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F.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18절의 ‘주의 성령이 내게(예수님에게) 임하셨으니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기 전에 성령이 임했다. 성령의 힘으로 했다는 것 보다 성령에 이끌리는 사역을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 충만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가난하게 되었고 죄에 포로 되었으며 진리로부터 눈이 멀게 되었고 사탄의 권세에 억눌린 자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하여 가난한 자가 부유하게 되고 사망의 늪에서 자유롭게 되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며 억눌린 곳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으로 오셨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시고 이 아름다운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보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번 성탄절에 예수님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