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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 고린도 전서 1장 18-25절

차작가 2023. 11. 26. 11:48

도입: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 됨이다. 부모가 자녀 양육할 때 가장 흐뭇할 때는 자녀들이 화목하는 것을 볼 때이다. 자녀들이 다투는 것을 보면 부모는 마음이 아프다. 마찬가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다투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아프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파당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나는 아볼로 파다, 게바파다,바울파였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집중했다. 이런 것이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미숙한 성도들은 그 사역자를 세우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보이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바울은 개척자였다. 개척에 은사를 가진 사역자였다. 반면에 아볼로 논리적인 변증가였다.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고 복음에 대해 변론하는 탁월한 학자였다. 게바는 목회자였다. 모두들 하나님의 사역자였고 은사가 달랐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도들은 문제를 일으켰다. 자기들의 취향에 따라 지도자를 선택했다.

본론:

그럼, 왜 이런 증상이 생겼는가?

고린도 도시의 독특한 문화가 영향을 주었다. 당시 헬라인(그리스인)들은 유명한 사상가를 중심으로 계파를 형성하는 것에 익숙했다. 고린도 지역은 세상 철학을 자랑하는 지역이었다. 누구한테서 영향력을 받았는가? 어느 대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는가가 중요했다. 이러한 점이 고린도 교회에 계파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다.

이렇게 파벌이 생긴 교회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십자가의 도였다. 여기서 ‘도’란 logos 즉, 말씀 메시지다. 십자가의 메시지이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의미한다. 그럼, 십자가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갈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 대속의 은혜로 우리가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의 메시지가 18절에 보면 사람에 따라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났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멸망하는 자들" (본문에는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금 멸망하는 길을 걷는 사람의 눈에는 십자가의 메시지를 미련하게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한심하게 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멸망하는 자란 쉽게 말해서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자란 뜻이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 해결 없이 살고 있다면 지금 현재 여러분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지옥 갈 사람이다. 요 3:36을 보면,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희가 아무리 부자라도 소용없다. 뛰어난 학자라도 소용없다. 문화인이라도 소용없다. 복음이 없으면 너희는 다 지옥 백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땅에서 예수 안에서 진리를 따라 살면 영생이라는 생명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살고 있으면 여러분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럼,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적으로 잘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자기 생명에 대해서 미련한 사람, 자기 인생에 대해서 미련한 사람이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19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사 29:14 을 인용한 것이다.

무슨 뜻일까?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지혜와 총명을 절대 시 하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께서 폐하시고 멸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폐하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지혜가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지혜나 총명은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갑자기 찾아오는 병이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나도 필요가 없다.

그래서,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제외하고 하나님을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미련하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인간을 원래부터 유한한 피조물로 지으셨는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도저히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미련한 존재 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만 인간이 미련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은 미련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기가 미련하기 때문에 자신이 진짜 미련한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의 과학 지식으론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과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조차 알 수 없다.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진화론으론 모든 만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과학이라는 것 자체가 불변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사실로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니었음이 많이 드러나고 있다. 무비판적으로 마치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세뇌되었던 수많은 진화론적 논증들이 그동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기만해 왔던가?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발달해도 계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21절에서처럼 하나님은 우리처럼 어리석은 인간으로 하여금 전도하게 하시고 그 전도를 통해서 인간들이 십자가의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셨다.

누구든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전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전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럼, 전도할 때 무엇을 전해야 할까? 바울이 살던 당시에 전도 대상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이었다. 22절에서처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기적 자체에 빠져서 기적에 경탄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기적에도 만족하지 않고 매일 끊임없이 새로운 기적들을 찾아다녔다.

하나님 믿는데 체험 신앙은 참 중요하다.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은혜롭고 중요하다. 그런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전설로 계신 분이 아니라 내 삶 속에 오늘도 현존하신 분이라고 확인되었다면 그다음에는 표적을 안 봐도 된다. 왜냐면 그분과 나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번 표적을 보고 나면 그다음에 또 다른 표적을 찾는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적 자체를 믿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 이단에 빠지기 쉽다. 이 세상에는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이 있다. 만약에 볼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그것은 안 믿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되었다면 보지 않고 믿는 것이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끝까지 자기의 이성과 지혜로 자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기의 힘을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개입할 틈이 없었다.

기적과 지혜를 구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항해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했다. 어떤 그리스도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이다. 2000년 전 로마시대에 십자가라는 뜻은 인간의 실패와 죽음과 수치의 상징이었다. 그 십자가 앞에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는데 우리가 고작 구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분이 하나님이고 구원자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분이 구원자라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모독을 안 당하셔야 하고 죄수가 못 박혀 죽는 곳에서 죽었다면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신명기 21장 23절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말씀을 믿는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렸으니까 저주받은 자였다. 그 저주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메시아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당연히 꺼려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방인(헬라인)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헬라인들은 신이 인간들의 일에 개입한 것을 신에 대한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의 개념에 대해 미련하게 생각했다.

또한 헬라인에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미련한 거였다. 왜냐면 헬라인들이 생각할 때 십자가는 이성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구세주고 하나님이면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구원하지 왜 저렇게 야만적이고 모멸스럽게 구원하는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십자가가 유대인에겐 거리낌이 되고 헬라인들에겐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들에게 감동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화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24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겐 그들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십자가는 미련한 것도 아니요, 거리끼는 것도 아니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은 예수님만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와 세상과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만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계속적으로 이루어 나가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은 구원받는 지혜이다. 십자가만이 죄인을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녀로 부르신 자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안다. 이사야 43장 1절, ‘야곱아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었나?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은혜로 구속함을 받았다. 내가 내 능력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은 자 만이 그 능력을 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사람들에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로 사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결론:

바울은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부르셨고, 이런 부르심의 은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내가 이 예수님을 위해서 내 삶을 던지면 분명히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누군가를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주님과 동행할 때 바울을 쓰신 것처럼 우리를 쓰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한 인간의 지혜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 속에서도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해 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