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항상 감사할 제목들 - 사무엘상 2장 1-10절

차작가 2023. 11. 26. 11:50

1. 사무엘서에서 한나의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 및 중요성

사무엘서의 초반의 배경인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에게는 한 마디로 재난의 시대였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답게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 도덕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실패했다. 가나안 인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의 종교적, 도덕적 부패와 타락은 그들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약속의 땅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어 약속된 땅을 소유하고 살아야 할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고 모압, 블레셋 등 가나안 세력에 내몰려 존립 자체가 불투명한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킬 사역을 준비하고 계셨다.

당시 한나가 살고 있던 시대는 하나님의 종인 엘리와 그의 아들들조차도 타락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와 그의 아들들과 대조적으로 사무엘을 그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셨다. 그리고 사무엘과 사울을 거쳐 다윗의 통치를 통해 그의 백성들의 삶을 반전 시키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다윗의 통치로 인해 빠른 속도로 일어서게 되며 다윗의 통치 가운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땅을 소유하고 그 땅 안에서의 안식을 경험했다. 이러한 흐름에 있어서 사무엘서의 역사는 인간의 모든 삶의 주도권이 하나님 한 분께 있음을 보여 주는 역사이며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속에 오늘 본문인 한나의 노래가 위치한다.

 

1장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 엘 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브닌나는 자녀가 있었으나 한나는 자녀가 없었다. 한나에게 자녀가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1장 5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한나의 불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실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예)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신 것

1) 결혼 금지 이유(16:2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자식 낳아봐야 결국에는 다 죽기 때문이다.

2) 초상집에 가지 말라고 하심 (16: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3) 결혼식에 가지 말라고 하심 16:9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젊은이들이 없어지고 모두 짐승처럼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한나의 불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던 시대에 즉 영적인 불임의 시대에 사무엘을 택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시겠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다. 이런 사무엘의 등장 앞에 벌어지는 일이 1장에 나와 있는 한나의 고난이다.

 

애를 갖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모르는 브닌나는 한나를 격동케 했다. 임신 못한 사실과 더불어 남편 엘가나의 한나에 대한 사랑(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이 브닌나로 하여금 더 한나를 격동케 했다.

이런 일들이 몇 년째 반복된 것으로 봐서(7절) 한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던 중에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이다. 한나 자신은 자식이 없어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하나님도 자신을 알아줄 자녀가 없어서 고통받으시겠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제사장이라고 세워 놨는데 백성이 기도하는지 술 먹고 주정 부르는지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을 보면 알만하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제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라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한나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기도를 시작했지만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다 보니 하나님의 마음이 읽었다. 한나가 위대한 것은 바로 그 절망적인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고통의 가장 절정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고, 그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 위대한 감사로 바뀔 수 있었다.

한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를 그대로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한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한 증인이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강렬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다. 그녀가 만난 하나님은 단순하게 두루마리 안에 기록된 문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셨다. 한나의 기쁨은 하나님이 그녀에게 주신 아들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선물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을 찬양했다. 한나는 사무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는 이 에서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담대하고 정확하게 적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2. 한나는 어떤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일까?

첫째 비교할 자가 없으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 찬양드렸다.

한나는 2절에서 “없으시니”라는 단어를 3번 반복하면서 비교할 자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반석이심을 강조했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은 구별이다.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다. 한나는 그의 불임이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과였음을 알게 되었다. 1장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되어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은 그녀의 문제도 남편의 문제도 아닌 하나님의 주권이었다. 하나님은 한나를 향한 뜻이 있어서 그에게 잠시 아이를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된다.

6,7절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죽이고 살리는 것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스올(음부,지옥)에 내려가게 하는 것과 올라오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가난하게 되는 것과 부자 되는 것고 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신분을 낮추거나 높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자녀를 낳지 못한 자는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는데 자녀를 낳게 되었으니 곧 산자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한나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았어도 항상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그런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녀를 가짐으로 부하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은 자였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게 되었다.

스올에 갇혀 있는 자였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예수님으로 인해 스올로 부터 건짐을 받았다.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예수님으로 인해 만족함을 얻고 부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주권적인 역사를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2) 하나님은 반석이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보호와 안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나를 보호해 주실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한나는 그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의지하지 않았다. 오직 반석 되신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반석 되신 하나님을 기초 삼아 믿음의 건물을 지었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반석 되신 예수님 위에 인생의 건물을 지어야 무너지지 않는다. 이렇게 반석 되시기 때문에 비교할 자가 없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시 18: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 62: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둘째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과 오만한 자들을 잘 아시고 판단하시는 분이다. 한나의 남편인 엘가나에겐 다른 아내인 브닌나가 있었다. 그런데 한나에겐 자식이 없었고 브닌나에겐 자식이 있었다. 삼상 1:6절에 보면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했다고 나온다. 아마 브닌나는 대 놓고 자녀 자랑을 하며 조롱했을 것이다. 이런 브닌나를 교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왜냐면 성경은 분명히 1장 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한나가 임신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면 브닌나가 임신한 것도 하나님 때문이다. 그렇다면 브닌나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겸손해야만 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녀를 갖게 된 것이 마치 자기가 잘나서 된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임신을 하지 못한 한나를 괴롭혔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이다.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브닌나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심판을 받았는지 정확한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2장 5절에서 보면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해졌다고 되어 있다. 자녀를 더 이상 낳지 못했다든지 건강이 좋지 않았다든지 결국에 그 말년이 그리 좋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교만한 사람으로 인해 시험이 들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으로 맘 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만일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세상 지식과 세상 가치관을 더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잠 16:18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인생 역전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5절 하반절에 잉태치 못했던 자가 일곱을 낳고 많은 자녀들을 낳은 자가 쇠약해진다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한나 자신이 체험한 기쁜 감격을 노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여기서 '일곱'은 '신적 충만(완전) 수'를 상징하는 숫자이니 만큼(Kail), 이는 곧 자녀 출산과 관련해서 한나가 받아 누린 하나님의 최대 축복을 상징한다(루트 4:15). 비록 당시에 한나는 사무엘 한 명만을 자식으로 낳았지만,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 가운데 낳은 자식이었으므로, 그 당시 한나는 마치 '일곱' 아들을 낳기라도 한 듯이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이전에 한나가 당했던 것처럼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슬픈 마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큰 기쁨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 이것은 분명히 브닌나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즉 브닌나는 한나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이제 교만한 말을 더 이상 떠벌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것은 실로 그녀가 쇠약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더 나아가 이 말은 브닌나와 같이 자신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모든 악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자랑하던 것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더욱 쇠약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곧 브닌나는 많은 자녀가 있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소망 없는 여인으로 쇠약해졌지만 한나는 비록 처음 잉태치 못했으나 약속을 받은 소망 있는 여인으로 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8절 상반절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신다는 고백이다. 이 표현들은 극도의 수치와 천대 가운데 있는 비천한 자의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그러한 비천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영화롭게 면류관을 쒸우신다. 그 실례로 우리는 요셉과 모세, 다윗과 다니엘 등을 들 수 있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노예 상태의 감옥으로부터 귀족 상태의 궁궐로 인도하셨고, 또한 보잘것없는 목자의 지팡이 대신 영광스러운 왕의 홀(笏)을 쥐여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가난한 자와 가진 자들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이 아닌 역전의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가진 자들에게는 불공평한 방식으로 보일 수도 있고, 혁명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토기장이처럼 하나님 자신이 온전한 선택과 주권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자유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불임 중에 고통받는 한 여인의 삶을 역전 시키셨다. 아픔과 상처와 절망과 수치로 가득 찼던 한 여인의 삶은 이제 희망과 기쁨으로 “가난한 자가 부하게, 궁핍한 자가 귀족과 함께 앉게 되며, 주린 자를 배불리게 하시는” 회복의 때를 선포하는 위대한 선언자의 삶으로 바꾸셨다.

 

하지만 한나의 삶은 위대한 하나님을 통한 역전의 삶을 살았던 흔적만을 남기는 삶이 아니었다.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께 자신의 아들을 드리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그대로 지키는 모습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화려한 삶의 고백으로 빛이 나는 인생이 아니라 그 삶의 고백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기에 한나의 삶은 더 아름답다.

이러한 한나의 모습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취해야 하는 하나의 위대한 삶의 모범으로 이었다. 영적 불임의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야 했던 삶의 모습은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들의 삶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그들의 삶을 기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드리는 것이었다.

바로 역전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그분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택해야 하는 삶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쳤을 때 하나님이 창세기 22장 12절에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이야기하셨듯이, 그녀의 진정한 인생의 역전은 바로 역전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알고 그분을 끝까지 믿었던 그 믿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혹시 지금 예전의 한나와 같이 인생의 불임의 아픔으로 고통 가운데 있다면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나님께 울부짖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인생의 역전은 바로 불임의 고통에서 역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신뢰하여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렸던 한 여인의 삶과 같이 바로 그 역전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임을 신뢰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공의가 사라지고 어두움만이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역전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므로 삶의 역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그 역전의 하나님을 통해 인생 역전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오늘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를 보았다. 한나가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체험할 수 있었다. 감사의 생활은 곧 기도에서 나온다.

기도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역전의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