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 마태복음 1장 18-25절

차작가 2023. 11. 26. 11:45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계획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뤄가심을 알 수 있다.

1:약속을 하심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우상을 숭배하며 지내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인 야곱으로 하여금 12지파를 이루게 하시고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는데 그냥 때가 되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애쓰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2:족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1-17에 메시아가 오시기 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다말에게서이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유다와 동침한 이방여인이다. 다말이 유다와 동침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의 자손을 잇고자 한 것이다. 유다는 인간적인 생각에 빠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야 된다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지 자기 아들을 살리려고만 했다. 결국 다말은 자기가 창녀와 같이 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가문을 잇고자 했다. 때문에 약속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둘째는 라합(수 2:1; 6:25)에게서이다. 라합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주므로 된 것이다.

셋째는 룻(룻 1:4,22)에게서이다. 룻은 남편을 잃은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편한 길을 찾아가지 않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나오미를 좇아간 모압여인이다. 이방 여인이 유대 땅으로 갔을 때 겪을 고초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이다.

넷째는 우리야(삼하 11:3)의 아내에게서이다. 우리야는 헷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밧세바는 이방여인이다.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이다. 그런데 밧세바가 기록되지 않고 우리야가 기록되고 있는 것은 다윗의 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우리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네 여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애쓰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3:예언하심(이사야)

이스라엘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중간중간 예언하셨다. 많은 예언들이 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 한 구절만 보면..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의 배경은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BC735년 경 유다 왕 아하스 때의 일이다. 당시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져서 서로 원수 같이 지낼 때이다.

그 때 아람과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남 유다를 치러 내려왔다. 왕과 백성들이 무서워서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그래서 유다 왕 아하스는 애굽에 도움을 청해 놓았다.

그 상황에서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은 겁먹지 말아라. 아람과 북 이스라엘은 절대 유다를 치지 못한다. 그들은 실패할 것이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징조를 구하라. 하나님께서 징조를 주실 것이다”

그랬더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애굽에 원조를 요청해 놓았기 때문에 이사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꾸중하시면서 “너 나를 믿지 않고 세상 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려 하는데 너 잘 못 하는 거다” 그러면서 “이 일이 내 말한 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증거를 내가 주겠다.” 하고 준 징조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너희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이다. 그러면 이왕 편을 들어주실 거 공격하기 전에 막아 주시면 안되셨을까? 왜 공격하게 놔두시고 사시나무 떨 듯 떨게 하시고, 실컷 두들겨 맞게 하신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하기 때문에 너희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셨을까?

그 부분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더러 아하스에게 가라고 하시면서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다.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 아들의 이름이 “스알야숩”이다. “스알야숩”이라는 뜻은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라는 뜻이다. 그게 왜 중요하냐면 이사야서 8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사 8:18) 내가 여기에 있고, 주께서 나에게 주신 이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 나와 아이들은, 시온 산에 계시는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는, 살아 있는 징조와 예표다.

그 이사야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는 살아 있는 징조라는 것이다.

아하스에게 갈 때 첫째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라고 하신 것은 “왜 내가 너희를 그토록 사랑하는데도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공격을 허락하는지 아니? 그것은 그 일로 너희를 정케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정케 되어 남은 자만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8장으로 넘어가서 둘 째 아들 이름을 “마헬살랄 하스바스”라고 짓게 하셨다.

이 “마헬살랄 하스바스”는 “심판이 속히 임하리라"라는 뜻이다.

이사야의 두 아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는 살아있는 징조, 예표이다. 남은 자를 제외한 자들에게 심판이 속히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다 왕 아하스에게 “너희는 내 백성이므로 내가 분명히 너희를 아람과 북 이스라엘로부터 건져 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고통을 원천 봉쇄하지 않고 너희들을 고통 가운데 두는 지 아니? 그것은 너희가 너희의 죄를 알게 하고 너희가 회개하고 정하게 되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를 공격하는 그 무리는 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거야. ”스알야숩, 마헬살랄 하스바스“

그리고 그 성경을 읽는 교회들에게 “교회야, 그 모든 일들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 것으로 시작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가 지금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이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은 예수님은 바로 “스알야숩”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만드시러 오셨고 그 남은 자를 제외한 다른 존재들에게는 “마헬살랄 하스바스” 심판의 존재로 오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4:성령으로 이루심

예수님의 탄생 기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다.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 과학으로 설명이 안되는 사건이다.

왜 성령께서 개입하셨을까? 이 일은 결코 사람의 영역에 속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다. 구원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의 역사였다.

5:요셉을 설득

요셉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요셉이 마리아가 바람을 피웠는지 알고 조용히 파혼을 하려 했다. 그 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 너와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하고 떠났다.

하나님 혼자만 열심히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순종과 희생이다.

6:요셉의 순종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즉시 순종했다. 그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인정하고 순종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요셉은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게 되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 동침치 않은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태어난 아이가 행여 자기로 인해서 태어났다는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정식으로 하면 요셉의 아들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요셉은 그러한 모든 것까지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시고자 하실 때 마리아와 요셉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고초와 어려움까지도 거부하지 않았다.

7:다른 사람들의 희생

다말은 자기가 창녀와 같이 되는 것도 불구하고 유다의 가문을 잇고자 자기 몸을 희생했다.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주었다.

룻은 이방 여인으로 유대 땅으로 갔을 때 겪을 고초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희생을 했다.

밧세바는 다윗의 죄로 인해서 죽음을 당한 자신의 남편 우리야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희생의 삶은 그때에 그쳐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땅에 완벽한 희생자를 보내셔서 그 희생을 근거로 해서 자기 백성을 찾고자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르는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당연히 누릴 권리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포기하고 그 권리를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자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의 삶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는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보내 시기 위해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애쓰시는 하나님을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시는 우리가 되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