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 누가복음 1장 39-56절

차작가 2023. 11. 24. 12:46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언급되고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은 탄생에 대한 기사가 없이 곧바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 또한 서로 다르다.

먼저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처럼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과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서로 만나는 내용이 없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1절)는 천사의 말이 마리아에게 주어진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에게 나타나 주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찾아온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요셉이 헤롯을 피해서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치고,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아이를 죽인 일을 말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동일하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예수님에 대한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해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신 참된 유대인의 왕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족보로부터 시작하며 예수님의 잉태 소식도 마리아가 아닌 요셉에게 알리면서 요셉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요셉이 예수님을 데리고 마리아와 함께 헤롯을 피해서 애굽으로 도망친 기사와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죽인 기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 즉 예수님과 연관되어 발생한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선지자의 예언 성취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증가함으로써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언약 성취자로 오신 메시아임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권세가 없는 비천함에 초점을 두고 시작된다. 천사가 예수님의 소식을 목자들에게 전해준 것이 그것이고, 제사장 사가랴나 요셉이 아닌 두 여인이 만나서 찬양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말씀의 성취로 인해서 세상에 오신 의인을 세상 권세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천한 낮아진 모습으로 나타냄으로써 세상의 부요나 권세라는 것이 하나님이 베풀고자 하시는 복과는 상관이 없는 것임을 증거하고 자 함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가 그나마 희망을 둘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일하면 나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약자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약자라는 형편에서의 탈출일 것이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말씀의 성취, 즉 말씀의 실현으로 세상에 등장하신 의인은 권세나 부요와 아무 상관이 없는 비천의 모습으로 증거 된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구원은 권세와 부요에 대한 욕망으로부터의 구출이며, 따라서 구원된 자로써 구원의 의미를 알 때 이웃에 대해 베푸는 것으로 그 구원이 증거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여인 

이러한 누가복음의 시각에서 두 여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살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비교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이며 이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다.

반면에 마리아는 초라한 나사렛 마을에 거하던 처녀였다. (가정부-가나안 혼인잔치에서 그 직업을 엿볼 수 있다) 즉 그 출신 조건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다.

그리고 두 여인이 아이를 잉태했지만 한쪽은 아이를 가진 것이 말 그대로 복이 되는 일이었고, 다른 한쪽은 아이를 가진 것이 오히려 그를 곤란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 상식대로 하자면 예수님은 마리아가 아니라 엘리사벳에게 잉태되어 오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칭함 받은 제사장 가문으로 오시면 예수님의 출신성분과 그 정통성이 인정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가 유대인들에게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제사장 가문이 아니라 나사렛의 초라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1절)라는 말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인간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말씀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두 여인의 위치 또한 세상적 조건에서 보자면 큰 격차가 있다.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아내이며 나이가 많은 어른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말한 대로 초라한 나사렛에 거주하는 여인이었을 뿐이며, 당시의 결혼 풍습을 생각하자면 14-15세쯤 되는 어린 처녀였다.

또한 엘리사벳은 아이가 없던 상태에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아야 할 복된 일이었지만, 마리아는 처녀가 임신을 한 것이기 때문에 축하 인사는커녕 비방과 책망을 들어야 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처럼 두 여인이 처한 상황과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누가 뭐라 해도 엘리사벳이 마리아보다 월등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반응을 보였다.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 

마리아가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엘리사벳이 큰 소리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2-45절)라고 외쳤다.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서로 다른 위치와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면, 여러분이 엘리사벳이라면 마리아에 대해 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엘리사벳은 지난 세월을 아이가 없는 고통 가운데 살아오다가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그것도 천사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 아이가 잉태된 것이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클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한 자신의 기쁨과 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충분히 비방 거리가 될 수 있는 마리아의 잉태를 기뻐하고 마리아가 복이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엘리사벳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복중에 있는 아이를 애지중지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굳이 엘리사벳의 입장이 아니라 아이를 가진 여인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를 사랑할 것이고 자신의 아이가 잘되고 높임 받기를 원한다.

더군다나 제사장 가문인 엘리사벳의 위치라면 시골의 어린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보다 자신의 아이를 더 존귀한 신분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어머니라고 일컬으며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라고 고백했다. 마치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참으로 황송합니다’라는 표현이다. 즉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가 자신의 주로 오신 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로 오신 분으로 인해서 자신도 자신의 아이도 기뻐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처럼 마리아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엘리사벳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조건 등은 전혀 보지 않은 채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이다. 이처럼 성령 충만의 상태는 내가 아닌 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주가 관심의 대상이고 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찬양 

45절에 보면 엘리사벳이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6-48절)고 화답했다.

마리아가 자신을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단지 주를 잉태하여 주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잉태한 주로 인해서 자신이 비천한 자리에서 높임 받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 것도 마리아가 잉태한 주가 어떤 분으로 오시는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를 주로 바라보며 찬양을 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이 잉태한 주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를 찬양했다. 그것이 49-55절의 내용이다.

마리아의 찬양을 보면 주로 오신 예수님은 교만한 자들은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는 위에서 내리치시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분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마리아의 찬양은 참으로 놀라운 십자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모든 일의 가능성을 인간적 조건에 두고 있는 시각일 뿐이다. 즉 좋은 조건에서 좋은 결과가 맺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뒤엎는 것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며 두 여인의 찬양이다.

마리아의 찬양은 주에 대한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고백이 인간적 조건과 실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그야말로 말씀의 능력이 이뤄내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마리아가 이 같이 놀라운 신학적이며 신앙적인 의미가 담긴 찬양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일하시고 말씀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두 여인의 만남이 증거하는 주의 세계

이처럼 누가복음은 그 시작에서부터 인간적 조건을 배격한 주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주에 대한 찬양도 사가랴와 요셉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약자인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두 여인의 만남과 찬양은 장차 마리아를 통해서 세상에 오실 예수님으로 인해 나타날 주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인간적 조건과 위치와 높고 낮음을 초월한 주의 세계이다.

오늘날 신자 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 나타나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적 조건과 세상에서의 위치 등은 모두 내려놓은 채 다만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누가 복음이 증거하는 주의 세계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비천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천함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의 위치와 조건을 앞세워서 자신을 높이 여기며 ‘너보다 낫다’는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다면 그것이 주께서 흩어 버리실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엘리사벳과 마리아처럼 서로 다른 다양한 조건과 위치에서 만나고 있다. 하지만 주 앞에서는 누구나 동일하게 비천한 존재이다. 이처럼 비천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만났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비천한 자리에 있는 우리를 높여주신 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의 만남에서 나타나야 할 주의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