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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의 의미(온유한 모세) - 민수기 12장 1-13절

차작가 2023. 11. 24. 12:41

 

‘온유하다’는 성격이 온화하고 화를 잘 내지 않고 남에게 양보를 잘하는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을 쉽게 떠 올리게 된다. 사실 성격이 급하고 거친 사람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더 신자답게 보인다.

온유를 성격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으로 이해하는 것이 세상의 시각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의미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본문을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구스가 지금의 에디오피아 지역임을 생각하면 구스 여인이 흑인이었을 것으로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구스 여인이 흑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구스 여인을 취한 것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을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 내용을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일에 초점을 두고 있질 않고 있다. 2절에서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고 말하는 것처럼 미리암과 아론은 하나님이 자신들과도 말씀하셨음을 언급하며 모세를 비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보면 미리암과 아론이 비록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일에 대해 비방을 했지만 모세를 비방하는 근본 이유는 다른 데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즉 구스 여인을 취한 일은 모세를 비방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에게 비방을 받는 모세를 두고 하나님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3절)고 말씀하심을 주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온유를 알기 위해서는 모세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모세의 온유는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일에서 드러난다. 모세의 온유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말씀하시는 배경은 구스 여인을 취한 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혹여 모세가 미리암과 아론에게 비방을 받아도 분노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으로 말하면서 그것을 온유로 해석한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모세의 온유는 도덕으로 흘러가게 되고 결국 믿음과 상관없이 누구에게서나 드러날 수 있는 온유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이 모세의 온유를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신 것은 모세의 온유가 인간의 성품이나 인품, 도덕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모세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출 12장에 보면 모세는 애굽의 관원이 자신의 동족을 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관원을 죽인 일이 있었다.

또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서 죽겠다고 모세를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을 모으고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고 말한 뒤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나오게 된 일도 있었다. 이것은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분노를 드러낸 것이다. 결국 모세는 이 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모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성격이 급하고 거친 면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세상 누구보다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살펴보면 모세가 가진 온유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심을 믿었다. 이것을 모세의 온유와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세의 온유는 성품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 자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미리암과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말로 비방을 했다. 이들의 비방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 보면 모세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듣는다는 불만이 담겨 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이 이러한 불만 섞인 비방을 하는 것은 광야생활에 대한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민 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만나 외에는 먹을 것이 없는 환경에서 고기와 애굽에서 먹었던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미리암과 아론도 백성들의 원망에 함께 동조하면서 힘든 길로 자신들을 이끌어 가는 모세에게 불만을 가졌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도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자신들과 의논 없이 이스라엘 이끌어 가는 것에 대해 비방한 것이다.

미리암과 아론은 이스라엘 안에서의 자신들 위치를 생각했다. 하나님이 모세와 말씀하셨다면 우리와도 말씀하셨으니 모세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나님은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서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6,7절)고 말씀하셨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선지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미리암과 아론이 하나님이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선지자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만약 선지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환상으로 하나님을 알리시고 꿈으로 말씀하면서 사용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말씀하셔서 사용하실 때 선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환상과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나는 선지자다’라며 자기 위치와 신분을 내세우며 대접받고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모세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충성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미리암이나 아론보다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러한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 이것을 모세의 온유이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모세의 신분과 위치에서 생각할 때 꺼려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구스 여인은 당시 이스라엘 여인 중에 뛰어난 신분이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방인이었고 따라서 이스라엘 내에서도 외면 받는 처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지도자로서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비방을 예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구스 여인을 맞이한 것은 모세가 자신의 신분, 위치 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세의 온유는 예수님에게서 완벽하게 드러났다. 마 11:29절에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면 곧 마음의 쉼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에 쉼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온유는 무엇일까? 예수님 자신의 존재가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귀함을 드러내고 세상의 중심에 자리하고자 하는 뜻이 전혀 없으셨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우리가 죄 없는 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섬김의 길로 가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며 그 겸손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다. 온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를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겸손과 함께 온유가 우리의 구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세상에서 나 자신을 견고히 세우는 길로 끌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나 나를 굳게 세우려고만 하는 자신에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깨닫게 되면서 나 같은 자를 받아주신 예수님의 온유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에게 온유는 예수님의 온유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천하고 지켜야 할 덕목이나 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사람이 되고자 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고 그 온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래서 온유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모세의 온유는 모세의 성품이나 인격에서 표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나왔다. 즉 언약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 모세의 온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의 신분이나 위치, 성품 등을 판단해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구원될 수 없는 자를 택하셔서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로 구원하시는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언약의 세계가 드러났고 성취된 것이다.

 

온유를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에 집중하는 것이다. 구원 받았음을 생각하기보다는 구원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 같은 자를 외면하지 않고 받아주신 예수님의 온유가 구원이 되었다는 진리의 사실이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믿음의 세계를 소원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의 길로 가는 것이다.

온유는 신자가 자신을 아는 자리이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의 저주를 끝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온유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 참여됨으로써 사랑의 증거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온유이다.

온유는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서의 성공과 잘남이 아니라 나를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을 더 큰 기쁨으로 삼게 한다. 그래서 온유는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게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온유를 배운 신자는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의 복

예수님은 마태복음 5:5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복은 보상 차원의 상이 아니다. 즉 온유한 자로 살았기 때문에 땅을 상으로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땅이라는 것이 부동산의 의미의 땅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아실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이 부동산이라면 땅 부자는 모두 온유하다는 말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부동산을 복으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신자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받아 살고 있다. 그 땅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 되어 다스리는 땅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거룩한 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의 특성을 드러낼 자로 부름 받은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온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자가 동일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함께 한 그 자리에서는 주님으로 인한 거룩과 은혜만 높임 받을 뿐이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땅을 살아가는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나는 누구이고 나에게 주님은 어떤 분인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유함으로 사는가를 묻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 하늘의 귀하고 영광된 것을 아는 자로서 세상을 초월하고 살아가는 믿음, 그 온유로 사는지를 묻고 있다. 나는 온유로 살고 있나?

그러나 우리의 삶은 너무나 마음의 여유가 없이 온유함으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초월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그만 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짜증을 내고 양보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내 자식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자는 무시하게 된다.

마음을 하늘에 둬야 한다. 하늘의 것을 안다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기뻐하고 평안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유 자체이다. 그 뜻에 복종하고 온유함으로 살기를 소망한다. 우린 너나 나나 똑같은 문둥 병자였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었다면 모두 저주 아래서 죽어야 할 자였다. 십자가 덕분에 이렇게 말씀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기쁨을 아는 자로서 온유함으로 살아가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