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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하라(달란트 비유의 오해) - 마태복음 25장 14-30절

차작가 2023. 11. 24. 12:36

 

본문은‘달란트 비유’로 불리는 종말에 대한 24:42절의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는 말씀의 연장선에 있다. 즉 종말을 기다리는 신자는 깨어 있어야 하는데 깨어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비유로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따라서 달란트 비유를 은사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를 크게 오해한 것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달란트 비유를 은사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달란트가 영어 성경에서는 재능이라는 뜻의 talents(탤런트)로 번역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인이 준 재능으로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것을 남긴 종은 상을 받았지만 주인이 준 재능을 전혀 활용하지 않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종은 벌을 받았다는 교훈으로 끌어가게 된 것이다.

결국 결론은 예수님이 주신 은사를 활용하지 않는 것은 게으른 것이고 장차 예수님이 오셨을 때 벌을 받는 악한 행위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받은 은사로 열심히 충성하고 일을 해서 많은 것을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오해를 낳게 했다.

하지만 15절을 보면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길 때 각각 그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인이 종들에게 준 것이 재능이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종들에게는 이미 재능이 있었고 주인은 그 재능에 맞게 달란트를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에게 재능, 즉 은사를 준 것으로 해석을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은 달란트 비유를 바탕으로 천국에서의 상급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주인이 돌아와서 셈을 할 때 각기 종들이 열심히 일해서 남긴 것을 따라 상을 주었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둠으로써 주인이 준 은사를 전혀 활용하지 않은 종은 무익하다는 선언과 함께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긴 것처럼 신자가 천국에 갔을 때 같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뭔가 게으르면 안 되고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들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생각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익한 종의 모습에 해당될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달란트 비유에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칭찬을 받은 종이 아니라 어두운 곳으로 쫓겨 난 종이다. 이 종이 왜 무익하다는 선언과 함께 어두운 곳으로 쫓겨났는지를 안다면 종말을 사는 신자가 깨어 있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달란트 비유는 열 처녀 비유와 동일하게 천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열 처녀 비유는 ‘그 때에 천국은’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14절의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보면 달란트 비유는 ‘그 때에 천국은’라는 말씀에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열 처녀 비유에서의 천국은 모두가 동일하게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달란트 비유에서의 천국은 주인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은 상태의 종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신랑이 오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 있는 자가 누구였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종말을 기다리는 신자로써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주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 중요성을 놓침으로써 단지 은사를 활용하여 열심히 충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 남기지 않은 것이 문제인가? ◉

먼저 주인은 종들의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길을 떠났다. 우리 생각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보다 적게 가진 것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은 분명 자신의 소유를 종들에게 맡긴 것이지 종의 소유로 이전을 해주고 떠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받았든 적게 받았든 결국 주인의 소유일 뿐 종의 소유는 아니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많이 받고 적게 받은 것이 불만의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달란트를 땅을 파고 감추어 둔 것이 단지 적게 받은 것에 대한 불만적인 행동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 있나? 다른 종과 비교해서 본다면 다른 종들처럼 장사하여 남긴 것이 없는 것을 잘못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인이 소유를 맡기면서 그 소유로 뭘 어떻게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한 적이 없다. 즉 장사하여 많이 남기라는 지시를 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대로라면 주인은 소유를 종들에게 맡겼을 뿐이고 종들은 주인이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았지만 맡긴 소유로 장사를 해서 남긴 것이 된다. 그렇게 보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온 종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답도 가능하다.

물론 주인이 지시는 하지 않았으나 주인을 향한 충성의 마음으로 장사를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으로 종의 잘잘못을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달란트 비유의 핵심에서 벗어난 채 겉만 맴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비유의 핵심은 장사를 하여 남기고 남기지 못한 것에 있지 않다. 만약 이 비유가 남기고 남기지 못한 것이 중요한 핵심이라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에게 받은 재능으로 무엇을 얼마나 남기고 살아가는가?’가 된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님께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가 되었든 그 은사로 남긴 것이 무엇인가를 답할 수 있을까? 아마 자신이 받은 은사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설령 받은 은사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은사로 무엇을 얼마나 남겼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악한 종의 잘못은 ◉

24,25절을 보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 이유가 주인은 굳은 사람이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씨를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일한 것이 없이 거저 주어지기만을 바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주인에 대한 종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주인이 맡긴 것을 손해 볼까 두려워서 땅에 감추어 두었다는 뜻이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 나름대로 주인을 판단했고 그 판단에 따라 장차 주인에게 벌을 받지 않을 방법을 고안하여 행동했다. 그것이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둔 것이었다.

주인은 이 종에 대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26,27절)고 책망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종이 주인을 잘못 알았다는 것일까? 물론 잘못 알았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종이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서 이자를 받게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달란트를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서 이자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감추어 둔 종의 행동이다. 즉 무엇이 종을 그러한 행동으로 이끌었느냐는 점이다.

종은 주인을 나름대로 판단했고 그 판단에 따라 자기에게 유리한 행동을 했다. 그것이 달란트를 땅에 감추는 것이었다. 그러면 만약 종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인에게 유익된 것을 생각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주인의 말대로 주님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분으로 판단했다면 돈을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을 것이다.

결국 결론은 종이 자기 나름대로 주인을 판단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행동했다. 주인의 유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유익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그것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장사하여 남긴 것은 주인의 지시 여부를 떠나서 주인의 유익을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 내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유익이 감추어져 있다. 즉 예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복 주신다는 판단 아래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적인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으로는 예수님을 위한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자기 시각에서 하나님을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 아래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한다. 헌금을 해도 그 대가를 받으려고 하고, 헌신과 충성을 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복을 기대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유익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악하고 게으른 것이며 깨어 있지 못하는 것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주인이 돌아오신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말을 기다리는 자로써 뭘 어떻게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으셨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기다림 아래 살아가는 신자로써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내 유익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우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는 누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자연히 예수님의 영광이 증거 되고 높여지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말을 시대를 잊고 살고 있다. 그래서 온통 내 유익에만 집착을 한다. 예수님의 영광은 관심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오직 내 영광과 이름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악하고 게으른 것이며 무익한 종에 해당되고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종말을 안고 있다. 죽는 순간 우리가 내게 유익한 것으로 여겼던 모든 것은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하는 헛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능력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다.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가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은 완성된 생명의 세계이다. 이 소망이 우리 중심에 있을 때 삶은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