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살기 - 민수기 22장 21-35절

차작가 2023. 11. 23. 13:14

이방 잡신의 예언자 발람 이야기 22:1-20

출애굽(B.C.1446년) 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 땅 동쪽 건너편 모아브 땅에 도착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이다. 모아브 평지는 약 20km 너비의 광활한 초원지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동안 아모리 족속을 비롯 이방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여 모아브 땅까지 오게 되었는데, 60만 대군에다가 2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나라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모아브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후손들이다. 저들이 여호와의 섭리를 제대로 깨닫고 있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여호와의 신앙에서 멀었기 때문에 형제 나라인 이스라엘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었고 두려워했다. 이에 모아브의 왕 발락은, 그 당시 만연했던 사신 숭배적 술법으로써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당대의 유명한 복술 가인 발람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방 잡신의 예언자 발람은 메소보다미아 브돌(현재 시리아 북부) 사람으로 브올의 아들이다. ‘발람’은 히브리 말로 ‘이방인’ 혹은 ‘탐닉자’, ‘백성을 망하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름의 뜻으로 볼 때,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 같다. 브돌은 유브라데스 강변에 위치한 도시로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말미암아 그곳에는 잡다한 우상숭배자들과 복술자들이 자연히 모여들게 되었으며, 발람은 당시 그들 중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모압으로부터 약 650km 떨어진 브돌까지 모압왕 발락이 수차례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모압 평지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모압 왕 발락이었다.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게 되자, 사자를 브돌에 보내어 발람의 도움을 청했다. 발람은 먼 나라 모압의 발락 왕으로부터,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 편에 거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 내가 앎이니라”(민 22:5-6) 하고 특별한 초대를 받은 것으로 보아, 당시에 얼마나 유명한 인물이었는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22: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22:8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

22:9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

22:10 발람이 하나님께 아뢰되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들이니이다 이르기를

22:11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22:13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때까지 발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2:14 모압 귀족들이 일어나 발락에게로 가서 전하되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

22:15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런데 15절부터 보면 발람에게서 뭔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발락은 발람이 오기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앞서 보냈던 귀족보다 더 높은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서 와달라는 요청을 했다. 더 높은 귀족을 보냈다는 것은 발람을 그만큼 높이 대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발람을 크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발람이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줄 테니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뜻이다.

22:16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22:17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이 요청에 발람이 무엇이라고 했나?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22: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모압의 사신들과 함께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20)

우린 이 말을 보면 발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발람의 믿음이고, 또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본문에서 발람이 가는 길을 여호와의 사자가 막아서고 또 34절에서 발람이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애당초 하나님이 발람에게 지시하신 것은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왜 뒤에는 가라고 하시는 것일까? 이러한 점이 오늘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이다.

먼저 발람이 두 번째 사신들이 찾아왔을 때 다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는지 알아보겠다고 한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분명히 하나님은 처음 사신들이 왔을 때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두 번째 사신이 왔다고 해도 그냥 그들을 돌려보내면 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또 다시 하나님께 묻겠다고 하는 것일까? 결국 발람에게는 귀족들을 따라서 모압으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락은 재물과 세상 영광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즉 발람이 또 다시 하나님께 물어 보겠다고 한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혹 하나님의 지시가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발람이 진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고자 했었다면 두 번이나 하나님께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다는 것은 첫 번째 답에 대해서 그대로 순종하기 싫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발람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첫 번째와 같이 '가지 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라'라고 하셨을까? 이것을 하나님이 뜻을 번복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아마 발람은 모압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이 나서 갔을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압 행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발람의 잘못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요나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기하고 있었다. 요나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 위에서 풍랑을 만났고 그 결과로 고기 뱃속으로 삼킴을 당했다. 그 사건으로 요나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됐다.

발람도 하나님이 모압으로 가라고 하는 말씀에 나귀를 타고 떠났지만 그 길의 도중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은 발람의 모압 행을 허용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모압 왕 발락의 유혹에 빠져있는 발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발람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귀를 이용하셨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나귀가 길을 가지 않고 밭으로 들어가 버렸다. 발람은 화가 나서 나귀를 돌이키려고 채찍질을 했다. 그래도 나귀는 발람의 말을 듣지 않고 발람은 계속해서 매를 때렸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시고 나귀는 발람을 향해서 말을 했다. 30절에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라고 했다. 나귀는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어서 인간과 대화를 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일시적이지만 나귀의 입을 열게 하심으로 상대적으로 발람을 나귀인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셨다.

하나님은 짐승인 나귀도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고발하셨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발람과 같이 짐승보다 수준이 낮은 인간임을 지적 받을 수밖에 없다. 나귀도 나를 바라보고 행동을 하는데 너는 왜 나를 보지 않고 네 뜻대로 행동하려고 하느냐를 지적하시는 것이다.

발람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 발람 스스로는 하나님이 모압으로 가라고 해서 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모압으로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발람의 마음이었다. 발람은 '나는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묻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럴 경우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럴 때 그 기도가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였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자신이 원하는 좋은 쪽으로 성취되기를 원하는 속마음을 감춘 기도였는지는 일에 대한 나중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겼다면 설령 일이 잘못되거나 잘 안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 자기의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는 신앙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현재 일이 잘 안된다면 그것이 현재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또 다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을 필요가 있을까? 결국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지금의 이 형편에 순종할 수 없다는 거역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일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발람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나귀가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에만 화를 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24절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 그대로이다. 좌우에는 담이 있다. 그리고 앞에는 하나님이 가로막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고, 막다른 길이고, 독안에 든 쥐이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아무리 한평생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쳐서 잘 살았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죽는다. 죽음이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말한다. 모든 자의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서 마쳐지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막고 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인생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앞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맞는 인생으로 빠져 나가보려고 애를 쓰며 살지만 그 애씀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영혼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발람은 자신이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음을 자신을 가로막고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31절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셨다. 그러자 비로소 발람의 눈에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가 눈에 보이게 되었다. 그러자 발람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나귀가 바로 여호와의 주장을 받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음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럴 때 발람의 입에서는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라고 고백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발람이 나귀를 때리면서 자기의 길을 가기를 재촉하는데 나귀는 가지 않고 버티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의 모습이다. 인생을 우리의 나귀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나귀 위에 타고 있다고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각자의 나귀가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했을 것이다. 마음대로 안되면 매를 때리면서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나귀를 끌고 갈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나귀, 즉 인생과 씨름하고 다투면서 살아온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나귀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귀는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탄 나귀 앞을 하나님이 가로막고 서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몰랐을 때 내 힘으로 나귀의 길을 돌이켜 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25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라고 한다. 억지로 나귀를 길을 가게 하려고 했을 때 발람의 발이 상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억지로 내 길을 가려고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고 바라볼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바라보든 돈을 바라보든 바라볼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보고 사는 그것을 통해서 더욱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하게 하실 수도 있다.

사람이 인생을 고통과 질고와 슬픔 속에서 영혼이 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는 인생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눈이 뜨여서 자기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내가 주인 되어서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인생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린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지금의 이런 인생에 태우신 것은 나를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환경으로 집어 넣으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발람과 같이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고백하게 된다. 눈앞에 보이는 인생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인생이 우리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이 우리의 마음대로 움직여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33절에 보면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라고 한다. 나귀가 발람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발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뜻대로 움직였다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결국 멸망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뜻대로 인생이 움직여 봐야 우리가 가는 길은 탐욕이다. 그래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인생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나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