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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믿으니 의로 여기심 - 창세기 15장 1-7절

차작가 2023. 11. 23. 13:11

1절을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을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당시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되는 어떤 문제가 있었거나 아니면 앞으로 두려워 할 문제가 닥친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브람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이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된다는 사실이다.

아브람이 무엇을 두려워했는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2절에서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해서 자식, 즉 상속자가 없는 것으로 두려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속자의 문제는 두려움보다는 근심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패배한 연합군이 다시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문제로 두려워했다고도 한다. 이미 적은 수로 승리한 경험이 있는 아브람이 전쟁 문제로 두려워했을까 라는 의문도 있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해 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의 문제보다는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는 말씀에 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방패를 주시고 상급으로 뭔가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방패고 상급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자신을 보호할 것을 구할 필요가 없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께 상을 받겠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믿음이 어떻게 잘못 이해되고 있고 어떤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가 될 만한 힘 있는 것을 얻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방패로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방패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네 방패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세상의 무엇이 하나님보다 더 든든한 방패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면 굳이 하나님께 상을 받고자 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신다고 해도 하나님이 상급이 되어주신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해 이미 가장 든든하고 부족함이 없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소유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거나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상으로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의지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절)고 답한다. 그리고 또 다시 말하기를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3절)고 말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다. 방패와 상급은 아브람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경험한 내용이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셔서 아브람이 보호 받고 승리할 수 있었으며 그 상급으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하고 많은 재물을 얻었다.

그런데 아브람이 갑자기 자식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하나님이 많은 수의 자손을 약속하셨지만 실제 현실은 자식이 없어서 종의 신분으로 있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아들, 상속자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 주의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의인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인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신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아브람의 의로 여기셨음을 주지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다른 것은 의가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믿어주는 행위조차도 의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람은 무엇을 믿었고 어떤 믿음이 의가 되는 것일까? 아브람은 단순히 후손이 많아질 것을 믿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아브람의 믿음은 자신의 가문 번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오류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지향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내게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지향하는 믿음이다. 믿음에는 이러한 다름이 있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여호와께서 의로 여기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교회를 보면 ‘믿습니다’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믿음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을 믿는다는 수준에 있다. 자신의 믿음을 도구 삼아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믿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면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차원 높은 믿음을 보여준다고 인정받았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믿음으로 보였지만 믿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몰랐다. 또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단지 믿음 좋은 자신들을 복주는 분이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을 의로운 자로 여겼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행함을 기반으로 한 스스로의 생각이고 착각이었을 뿐이다. 의의 조건을 자신에게서 찾은 것이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자식이 없기 때문에 엘리에셀이 상속자라고 말했다. 이것이 아브람의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의 해결책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곧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믿음의 내용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내세웠던 자신의 해결책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은 것이다. 이 믿음이 아브람에게 의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은 인간의 행함과 방법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실 구원자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의가 되는 믿음은 하나님의 개입과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어 있다. 이 믿음은 자신의 행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행함은 단절되고 예수님의 이루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죄로 인한 자신의 한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의가 되심을 바라볼 뿐이다. 예수님이 의로 오셨음을 믿기에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의가 된다.

 

6절: 믿으니

아멘이라는 뜻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줄 믿는다.이다.

히필동사: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 가능해 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후사를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을 것임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에는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믿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세상이 생각하는 믿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신에게 나의 정성을 보여주면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소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다.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것을 기다리는 믿음이다.

사람은 절대 이 믿음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인간의 소원은 부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인간의 욕망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인간의 뜻은 부인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은 채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실지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을 인간은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세상이 생각하고 말하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는 습성이 있다. 믿음이 좋으면 그만큼 행함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행함은 대개가 교회 생활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리고 세상의 도덕과 윤리의 틀에 갇혀 있다. 그래서 선행이 많으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 교회에서의 활동이 많고 부지런하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브라함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 여김 받았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행함은 우리를 의의 자리로 이끌어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롬 4:5절에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한다. 얼마나 신나는 말씀인가? 우리는 지금껏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경건하고 믿음이 있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에 얼마나 마음을 많이 두고 살았나? 그러나 하나님은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만약 자신의 가문이 번성하게 될 것을 믿고 그것으로 기뻐한 것이라면 그 믿음은 세상의 믿음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분임을 믿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어주실 것을 믿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의 함정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은혜를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도 그 은혜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가 천국에 가는 것을 믿고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결국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대해 질문한 부자처럼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고도 말씀을 하셨고,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 신자고 좁은 길로 가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인간이 원하는 것이 없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영광 이러한 것들이 없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다.

그렇다고 해도 신자는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것임을 믿는다. 다른 길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에 있는 신자는 가는 길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길만을 바라보게 된다. 이 믿음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참된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에는 인간의 소원과 욕망이 없다. 이것이 세상의 믿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자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믿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한다.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시고, 우리를 그의 지체가 되게 하셔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