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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 여왕의 솔로몬 방문 - 열왕기상 10장 1-10절

차작가 2023. 11. 22. 13:13

도입:

사람들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장난감을 수집하고 또 값나가는 운동화를 수집한다든지 자동차를 수집한다든지... 등등 아마도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보물과 같을 것이다. 그 좋아하는 것을 보물이라고 말한다면, 종류는 다르지만, 보물을 추구하는 마음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보물이 주는 행복감 때문이다. 즉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보물인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공통적인 마음이며 또한 인간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본론: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이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한 구원이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한 구원은 우리를 우리의 행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내 행함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염려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한다. 그래서 보물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기쁨, 행복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다(1절). 스바 여왕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하고 솔로몬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2,3절).

이로 인해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왕궁과 성전의 규모와 상의 식물과 신하들 등을 보고 놀라게 된다. 스바 여왕이 얼마나 놀랐는가는 6,7절의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스바 여왕이 단지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에 대해서만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8,9절의 내용을 보면, 이방 여인에게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말을 들을 수 있다.

스바 여왕은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 찌로 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8.9절)는 말을 한다.

즉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능력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지혜를 주셔서 공과 의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송축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과 같은 왕을 두어서 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이 복이 아니라, 항상 솔로몬 앞에 서서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작 이스라엘이 항상 솔로몬 앞에서 지혜를 들을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가? 이고 솔로몬 역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는가? 에 있다.

만약 우리가 스바 여왕의 입장이었다면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복되다고 했을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솔로몬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을 항상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는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부럽게 보일 뿐이다.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것을 누렸으면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 앞에 서서 지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이스라엘이 부러워했다. 그리고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공과 의를 행하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다.

마 12:4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 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지혜에 대해 무관심한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도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10억 짜리 차를 가지고 행복을 맛본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마지막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멸망이라는 말 자체를 우습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옥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사로를 자기 형제에게 보내서 지옥의 실상을 증거하여 자신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멸망이라는 말에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다. 살았을 때 좋은 것만 원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사람은 세상에서 좋은 것만 주어지기를 원한다. 좋은 것이 주어짐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 어떤 행복을 누린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 멸망으로 마치는 인생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지를 않는 것이다. 이것이 정죄 받을 이 세대의 실상이다.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예수님을 거부하고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로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인생의 비참함이다.

이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다고 해도, 세상일에 방해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복됨을 알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사랑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달라지기를 원하기보다는 내 환경이 달라지기를 원한다. 환경만 달라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대에 오직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온 스바 여왕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도 스바 여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지금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의인이기에 달라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자신이 달라져야 하고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자로, 예수님을 아는 자로, 복음을 아는 자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이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타인을 고치고 달라지게 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기에 말씀을 듣는 자의 복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 12:39-40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라는 말씀을 한다.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고 도망을 쳤다. 요나의 생각에 니느웨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악한 이방 민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도 역시 고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요나에게 알게 하신 것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힌 죽음의 경험이었다. 즉 자신도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하신 것이 요나의 표적인 것이다.

예수님이 사흘을 땅속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땅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에 있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지혜가 미련하게 보이기에 결국 예수님에게서 자기 행복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스바 여왕이 정죄하는 이 세대의 실상이다.

결론:

신자는 세상을 향해 정죄하는 자로 세워졌다. 신자가 완벽하기에 정죄하는 자라는 것이 아니다. 죽어야 할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는 뜻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리로 내려가면 우리를 구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나는 복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