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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유래 - 신명기 14장 22-29절, 말라기 3장 7-12절

차작가 2023. 11. 22. 13:05

도입: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 거룩이란 구별이란 뜻으로 거룩한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존재여야 한다. 구별이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인데, 독특한 사고방식이란 예수님께서 오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주신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서 애굽과 전혀 다른 세계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이 두 나라는 사고방식이 각각 달랐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애굽적 방식은 버리고 새로운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삶을 배워야 했다. 이 새로운 나라의 삶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가 '십일조'인 이다. 결국 십일조에는 새로운 세계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지 돈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란 무엇인가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태도이다.

'십일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십일조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과연 이스라엘이 어떤 백성 되기를 원하셨느냐는 질문이 된다. 십일조를 하라는 규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도 '십일조란 무엇이냐?'를 배워가면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함께 점검해야 한다.

그러면 십일조란 무엇일까?

본론:

1. 신명기 14:22-29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고 말씀 하신다.

이 말씀을 보면 십일조란 바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라고 하신다. 결국 십일조의 규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십일조를 바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권속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가운데 배워지는 것이다.

무엇을 바쳤느냐? 얼마나 바쳤느냐? 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14: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14: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14: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십일조를 바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서로 모여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바친 십일조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되는가를 알아보자.

22절에 보면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우린 보통 십일조를 내면서 내 소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친 것으로 신자로서 해야 할 감사와 의무는 다 한 것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돈에 대한 권리를 자신이 차지한다. 즉 십일조를 십분의 구에 대한 권리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규례 정도로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토지소산의 십분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셔서 너희들을 은혜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이 소산물을 얻게 된 것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싸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소산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서로 나누고 기뻐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함께 먹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의 즐거움은 단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되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기뻐하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십일조란 소득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생겨난 삶입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약의 의미로 말하자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삶 전체가 주님의 희생 덕분에 생겨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믿음이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의 삶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 다니고 학교 다니고 가정일 하면서 살아가는 삶은 동일하다.

새로운 삶이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내 인생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지금까지 내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오만함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자신을 주님의 세계로 인도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든 못 다니든, 비즈니스가 크든 작든,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관계없이 그 모든 것은 은혜의 세계 안에서 주어지는 조그만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직장을 못 다녀도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공부를 못해도 역시 은혜 안에 있으며, 돈이 없어도 은혜 안에 사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희생으로 주어진 새로운 세계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십일조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십일조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로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모두가 같은 신세였다. 모두가 종이고 나그네였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덕분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는 처음 신분 그대로이다. 강자 약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강자 약자가 구분되어서 약자가 제외되고 따돌림당하는 것은 이미 은혜의 세계가 깨뜨려진 결과이다. 그래서 27절에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한다. 없는 자라고 저버리는 것은 십일조의 정신이 아니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내가 하나님의 복안에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즉 나 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복안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할 때 그것이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된다. 신자는 이런 마음으로 자원해서 기쁨으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사는 인생이고 누군가가 살려주는 인생이다. 이것을 확인하면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곧 십일조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십일조의 정신이 확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함께 먹고 즐거워할 수 있고, 우리 가운데 어렵고 힘든 자가 있을 때 그들과도 나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것으로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가 다시 이스라엘로 주어져서 그것으로 먹고 즐거워했다. 즉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된 상태에서 먹고 즐거워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실체는 무엇일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것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수 있게 하셨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내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나? 하나님께서 주신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하며 모이고 있나? 주님의 몸과 피로 기뻐한다면 염려하고 불안하고 걱정하는 인생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하는 규례이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현장이 되어야 하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 29절과 같이 기업이 없는 레위인, 객 고아과부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린 하나님의 것으로 먹고사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 덕분에 살아간다. 내 것이란 없다. 오직 은혜로 살 뿐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십일조 안에서 사는 것이다.

2. 말라기 3:7-12,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현대 교회에서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철저하게 왜곡해 가르쳐지고 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죄라고 하면서 거의 협박 수준의 말로 사용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씀하자면 하나님은 십일조를 철저히 하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본문을 이해하자면 아까 말한 십일조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십일조 규례를 세우신 것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한 레위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압제 받고 소외된 자들의 구제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셨다. 따라서 기업이 없는 레위인이나 약자에 속하는 자들의 생존 여부는 이스라엘의 십일조에 달린 것이 된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게을리한다면 그것은 곧 레위인이나 약자의 생존에 위험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레위인에게는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셨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는 일과 연관이 있다.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면서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는 일을 했다. 이스라엘은 회막에 나아가 제사하면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회막에 나아갈 수가 없고 오직 레위인이 이스라엘을 대신해 회막에서 봉사하고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담당하는 일을 하도록 규정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위인은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는 없으면 안되는존귀한 존재였다. 레위인의 생존이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위인이 존귀한 자로 대접받는 것은 어떨 때이며 그것은 무엇으로 증거 될까?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자 한다면 레위인을 존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철저히 함으로써 레위인의 생존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죄에 대해잊고 산다면 자연히 레위인의 존재 또한 희미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십일조에 대한 소홀로 이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와 회개를 팽개쳤다는 것이고, 죄와 회개를 팽개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또한 잊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다. 원망과 불평으로 일삼은 것이 그들이었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보다는 현재의 삶의 풍요를 더 원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하고 그 땅을 기업을 받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 때문에 그 무엇도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잊지 않도록 위해 십일조의 규례를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현재 삶의 풍요에 마음을 두었다. 오로지 생존 문제에만 마음을 쏟았기 때문에 자연히 십일조에 대해 소홀해졌다.

이것이 말라기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상실된 채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것은 무엇일까? 8절을 보면 선지자는 십일조와 봉헌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말한다. 하지만 선지자가 말한 십일조와 봉헌물은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일조의 정신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어떤 재물을 바친다고 해도 이정신이 상실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십일조와 봉헌물이 될 수 없다. 즉 십일조와 봉헌물을 재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하나님께 바쳐지는 모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봉헌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와 죄 용서로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재물을 원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라는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죄 용서에 감사하는 참된 이스라엘을 받고 싶으신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되는 하나님의 소유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용서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으면서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것은 이스라엘로 나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붙들려서 하나님이 주인 되어 계시는 나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일에 불평하고 뭔가를 바치면서도 복을 기대하는 그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주를 더럽게 하는 것이고 괴롭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행실에 대해 무지했다.

이스라엘은 회막이 있고 레위인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항상 현실의 삶에만 마음을 두었다. 그래서 풍요롭지 못하고 어려움으로 인한 고통이 지속되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사랑도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회막을 세우시고 레위인을 있게 하신 것이 이미 이스라엘을 이방인과 구별하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회막과 레위인의 존재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이방인에게는 없는 죄 용서의 통로가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 용서의 유일한 통로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가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삶의 풍요에 매임으로써 이 같은 사랑을 사랑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찾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으면서 자신의 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괴롭히고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임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신자가 확증할 수 있는 사랑과 은혜의 현장은 십자가이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온전히 드러난다. 이 은혜와 사랑을 가볍게 여겨서 안된다. 신자는 예수님으로 생명을 얻은 자이다. 이 생명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그가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와 봉헌물인 것이다.

결론:

십일조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하는 규례이다. 십일조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재물을 원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라는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죄 용서에 감사하는 참된 성도의 자세를 받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 모두 십일조의 정신을 바로 알아 하나님께 바른 십일조를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