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하나님의 축복 - 민수기 6장 22-27절

차작가 2023. 11. 22. 13:0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복을 풍족하게 주어지고 아무 탈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복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아마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상식일 것이다.

또한 복을 받는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했길래 저런 복을 받을까? 라는 말을 흔히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복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주시는 복이다.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야곱에서 시작한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자신이 주도(장자권 획득하는 것, 원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간 일한 거 등) 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주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담대히 얍복강을 건너 형 에서를 만난다. 그전에는 죽을까 봐 아내와 자녀를 먼저 보내고 자신은 뒤에서 상황을 살펴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이란 이름을 받은 뒤론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모습에서 진짜 복된 인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복은 무엇을 받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는 게 진짜 복이다.

그럼,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뜻을 가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이다. 구별이다. 구별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를 철저하게 구별하셨다. 서로 섞이고 타협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도 하나님은 가나안의 모든 거민을 다 멸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가나안 거민의 생활풍습과 사고방식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만의 특성이 있는데 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낸 거룩한 모임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모인 사람들이 뭔가 다르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이스라엘 되게 한 어린 양의 피가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여김 받는 것이다.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구별이었다.

레위기 11:44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고하셨다. 이규례대로하면 이스라엘은 땅에 기어 다니는 것만 멀리하면 거룩하게 된다. 그러나 구별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스라엘 아닌 사람들은 땅에 기어 다니는 것도 음식으로 먹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먹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구별되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교회는 구별을 단지 이런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물론 구약의 규례는 신약에 와서는 사라졌기 때문에 구약대로 음식을 가지고 구별되게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약의 규례도 단지 규례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단순히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규례의 의미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규례의 의미를 모른 채 규례를 지키는 것은 구별과 전혀 상관이 없다.

레 11:44절에서 땅에 기어 다니는 것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더럽다고 하신 것은 어떤 특정한 동물들이 아니라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 자체를 더럽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은 세상과의 구별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린 양의 피로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자, 그러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무엇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었다'라고 생각할까? 거의 모두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구별되었다고 여기는 옛날 이스라엘의 모습과 똑같다. 옛날 이스라엘 이 귀례의 의미는 무시하고 행동만을 가지고 구별을 자랑했듯히 오늘날도 행동만을 가지고 구별되었다고 여기고 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 예배드린다는 것,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구약에서도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구별을 요구하신 것 같이 오늘날도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구별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과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종교의식이 있다고 해서 구별된 것이 절대로 아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구별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사느냐가 문제이다. 세상 사람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절대로 구별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식이 성도와 불성도로 구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에는 자기들의 종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와 형태는 다르다고 해도 자기들이 믿는 신 앞에 나와서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경배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종교가 똑같다. 예배만이 아니다. 기도나 헌금이나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각기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자신의 정성으로 제물(헌금)을 바치는 것도 동일하고, 자신의 종교를 보급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을 전파하는 것도 동일하다. 다르다면 각기 부르는 신의 이름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부르는 신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종교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요구할까? 복을 원한다. 절간을 찾는 사람들이 부처 앞에서 두 손 모아 비는 것이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팔공산 갓 바위를 찾아가서 빌고 또 비는 것이 무엇일까? 조상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후손들은 무엇을 빌까? 신을 받았다고 하면서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면서 굿을 하는 무당들이 비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리고 기도원을 찾아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비는 것이 무엇이며,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헌금 바치는 자들이 하나님께 비는 것이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구분을 할 수 있을까?

승려들이 큰 절간의 주지를 맡는 것이 소원인 것과 목사들이 큰 교회의 당회장이 되고 싶은 것이 소원인 것과, 일반 사람들이 직장에서 높은 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른 것이 뭘까? 승려가 자기 전에 찾아오는 불자가 많아지고 돈도 많아져서 큰 절간을 짓고자 하는 것이나, 목사가 교인 수 늘려 가지고 큰 교회 짓고자 하는 것이나 사업하는 사람이 사업 번창시켜 가지고 큰 회사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뭘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되고자 하는 세상의 욕망 속에 빠져있기 때문에 비록 종교의 모습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구별이 아니며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사고방식이 같기 때문에 추구하는 바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갓바위를 찾아가든 하나님을 찾아가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같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나 갓바위를 찾아기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데 도대체 무엇을 통해서 구별을 보이겠다는 것일까?

오늘 주제가 축복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축복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장황하게 구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지금 기독교의 모습에는 전혀 구별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이다. 단지 기독교적인 종교의식이 있는 것으로 '나는 성도로서 구별되었다'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라 하면서 어디에서도 세상과 다른 구별이 없다.

오늘 읽은 본문 앞에 나실인에 대해 나온다. 나실인은 한마디로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사람이다. 나실인이 자기 몸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몸을 구별하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관심은 자기 몸에 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좀 더 풍족하게 좀 더 많은 것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볼까에만 모든 목적을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나실인으로 사는 것만이 세상에서 구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그러면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을 산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축복이다.

23절에 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도"라고 말한다.

나실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뒤에 축복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축복은 나실인 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친 나실인 된 자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23절에서 나실인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라고 하시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은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존재들이며, 나실인같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자만이 하나님의 복안에 거하는 참된 이스라엘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복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 했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복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우리는 복을 생각할 때 '내가 받는다'라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러나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복 아래 내가 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것을 복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27절에 보면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한다. 제사장 마음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출 20:24절을 보자. "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라고 말한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해놓고 그곳을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번제와 화목제는 무엇인가? 제물의 희생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희생이 있는 그곳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고, 하나님은 그 위에 강림하셔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인데, 기념하는 그 자리가 바로 제물의 희생이 있는 곳이라면 결국 제물의 희생 그 자체가 바로 여호와를 보여주는 일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위에 복이 강림한다고 하셨으니, 결국 여호와의 복은 여호와를 보여주는 희생이 있는 곳에만 강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고 누가 온전히 여호와의 희생을 보여주셨을까?

바로 예수님이시다. 십자가는 제단이었고, 예수님 자신은 제단 아래서 여호와의 희생을 보여주시며 죽으셨다. 그리고 여호와의 복은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에게 강림했다. 이제는 예수님이 복이 되시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여호와의 복 아래 거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이 복이 되신다'가 결론이다. 복의 의미가 세상과 전혀 다르다. 예수님이 복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으로 이미 북을 받은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이미 우리의 마음이 부요한데 또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그리스도로 부요한 자는 더 이상 세상의 것이 복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욕심이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희생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곧 축복이 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희생의 모습이란 곧 나실인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헌신하는 상태에 있는 나실인 된 자를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며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실인의 모습으로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구별되게 살아가는 자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복 아래 거할 참된 성도들이다. 하나님은 복은 교회에 나온다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복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실인같이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자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진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 신분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복은 예수님에게 강림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복을 찾지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복안에 거하는 길이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실인 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희생과 헌신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기념하며 살기를 애쓴다면 세상의 일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전남 신안 앞바다에 증도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매년 여름 태풍이 불기만 하면 해변가에 그릇이 밀려온다고 한다. 그릇이 밀려오는 이유는 뻔하다. 배가 난파되어서 것이다. 그런데 섬사람들에게는 가지 미신이 있었다. 미신은, 귀신 붙은 물건은 집안에 들여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증도 사람들은 행여나 죽은 사람이 쓰던 물건이 섬에 해라도 끼칠까 해서 매번 그릇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이유는 귀신 들어오지 말라고....

그런데 하루는 목포 시청에서 일하는 공부 꽤나 젊은이가 자기 친척을 찾아오게 되었다. 동네를 돌다 너머 마당 쪽에 있는 똥개 마리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개의 개밥그릇을 청년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주인에게 ‘이거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어차피 삼 년에서 갈아야 하니까 가져가라"라고.

목포로 돌아온 청년은 개밥그릇을 되팔게 되었다. 값이 얼마였을까? 1975 일인데, 당시 강남 32 신축 아파트 값이 2백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밥그릇의 감정가는 2 8천만 원에 낙찰되었다.

당나라로 가던 무역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파선해서 태풍만 불면 바다 위쪽에 있던 그릇만 밀려서 해변으로 왔는데 섬사람들은 매번 귀신 붙었다고 보이는 족족 박살 내서 해변에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 개 밥그릇 사건이 있던 이듬해인 1976년부터 9 동안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보물선 인양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9년간 인양한 것을 모아 전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국립 해양 박물관이다.

귀중한 그릇을 할아버지도 깼고, 아버지도 깼고, 아들도 깼다. 1975 개밥그릇의 가격이 2 8천만 원이다.

성도의 가치는 어느 정도 일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 개밥그릇과는 비교할 없을 만큼의 목적과 가치를 두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그런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것이다. 혹시 자기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개밥그릇으로 알고 그저 그렇게 인생을 사는 우리가 아니길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이미 복을 받은 백성이다. 바라건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귀한 가치를 깨닫고 귀한 열매 맺는 인생을 살길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