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징비록. 풍신수길이 조선을 칠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 국론이 분열되는 모습. 똑 같이 통신사로 갔지만 보고는 달랐다. (정파 이익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다름)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에 직면 한다. 그 때 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이 왜 어떻게 일어났을까 생각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바른 결정을 해야 한다. 예상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갈피를 잡겠는데 오늘 본문처럼 예상치 못한 문제에 당면할 땐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본론:
1. 본문의 내용 요약
오늘 읽은 본문은 다윗은 그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황급히 도망가고 있는 처지를 다루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 자식에게 쫓기고 있어 화도 나고 수치스럽기 까지 한데 사울 가문 출신의 시므이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더 수치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전무후무 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쫓겨가는 다윗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 일행을 따라가면서 다윗을 향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라!”면서 돌을 던지고(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이다) 티끌을 날리면서 다윗을 심하게 저주했다(삼하 16:7).
2. 이 사건을 보는 세 가지 관점: 시므이, 아비새, 다윗
시므이의 관점: 자기 중심적 관점
16: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내용은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압살롬의 나라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을 하고 있다. 시므이는 다윗이처한 상황을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울의 왕위를 빼앗은 다윗을 벌주기 위해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다윗에게 일어난 상황만을 본다면 사울 가문의 한 사람으로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므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자신의 복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되면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고, 잘못되면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볼 때 다윗이 처한 상황은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거나 돕고 계시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을 벌주시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아무리 봐도 다윗의 상황은 어둠이고 불행이며 복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윗의 상황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신 결과 인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시므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 입장에서 해석해 버렸다.
이유는 모든 일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꿰어 맞추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점이다.
다윗의 상황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던건 분명하다.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악한 범죄를 깊이 생각해야 했다. 사울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으며 다윗이 자신의 죄를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볼 때 시므이는 하나님의 일을 철저히 자기중심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체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누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쉽게 알 수 있겠는가? 시므이는 사울의 집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이 마치 사울의 편을 들고 사울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여겼다.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비새의 관점: 사건 자체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관점
아비새는 요압의 동생이며 다윗의 충성된 신하였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가져 온 세 용사 중의 한 명이다.
만약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모르긴 몰라도 분노하면서 함께 욕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반응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주하는 자보다 더 힘이 있다면 저주하는 그에게 힘으로 복수하지 않을까? 본문을 보면 아비새란 사람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 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아비새가 저주하는 시므이를 죽은 개로 표현하는 것은 시므이에 대한 아비새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아비새는 저주하는 시므이의 목을 베겠다고 말했다.
다윗과 함께 도망을 치는 상황에 있는 신하들도 마음이 편치를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을 저주하는 말을 들었으니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누구나 아비새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다윗의 신하 된 사람으로서 시므이의 저주 사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왜냐면 자기가 섬기는 왕이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고자 하는 인간적 반응을 보였다.
징비록 드라마에서 충신수길 옆에 있는 두 장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모습을 보는데 풍신수길의 오른 팔인 가등청정은 소서행장 보다는 덜 객관적인 인물로 묘사 된다. 주군만 바라보면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맹목적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에 집중하지 말고 우리 공동체 사람들에게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 대한 집중과 분노는 당면한 현실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본질을 흐리게 한다.
다윗의 관점: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관점
그러면 아비새의 이러한 요청에 대해 다윗의 반응은 어땠을까?
16: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6: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은 시므이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므이에게 시키신 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아무도 시므이에게 ‘네가 왜 다윗을 저주하느냐?’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 ‘왜 다윗을 저주하십니까?’라고 원망하는 것과 같음을 다윗이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의 모습이다.
다윗이 보여주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이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결국 다윗의 이 말은 오늘날 믿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우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날마다 일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다윗과 같은 고백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시므이의 저주를 다윗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저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봤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하고 계신 것으로 인정했다. 다윗은 자신을 돌아볼 때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생각했다.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던 우리아를 죽인 것이야 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 죄임을 깊이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집안에 재화가 일어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묻고 계심을 알았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죄에서 저주 받아 마땅한 자신을 보게 되고, 그러므로 시므이의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다윗이 이런 굴욕에도 분노로 대처하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므이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시므이를 처단하기 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시므이의 그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렇게 뜻하셨으니 반드시 견뎌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주께서는 정의로우며 유익한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of God)를 믿는 자세이다.
섭리란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통치를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위로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그의 권세로 붙잡고 계시고 그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지혜로 주관하시므로 그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야 말로 위로가 되는 것이다. 만물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이 때문에 우리가 확신에 찬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한 것이 가장 큰 비참함이요, 또한 최고의 행복은 바로 그 섭리를 아는 데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 우리 주위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히 일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결론: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시므이의 모습이 아니라 분노할 때 분노하는 아비새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다윗의 믿음이 있길 바란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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