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언약궤에 담긴 의미 - 히브리서 9장 4절

차작가 2023. 11. 22. 13:10

도입:

인디아나 죤스(1981) 영화 이야기 줄거리

기원전 59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공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이후 구약성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언약궤(성궤)를 손에 넣으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갖고 이를 찾아 나선 나치와 대결하며 모험을 하는데….. 언약궤를 힘으로 생각함.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가?

본론:

1. 언약궤에 들어 있는 세 가지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구약의 성막과 성막에서 행해지던 제사 예법에 대해서이다.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된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

 

2.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배경:

홍해를 건넌 지 한달이 안되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을 했다.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애굽에서, 즉 세상에서 전혀 보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했던 만나를 내려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것은 일단 이스라엘 백성의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배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이 원하는 음식을 주셔야 했다. 또 처음부터 아예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시는 것일까?

만나란 세상의 음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이다. 배불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을 좋아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출 16:32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주어진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다.

3.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배경:

민수기에 보면 레위의 자손 고라와 르우벤 자손인 다단 아비람 온이 서로 결탁을 해서 다른 족장들과 함께 모세를 반역했다. 이들은 모세에게 '너하고 우리하고 다른 것이 뭐냐 우리도 거룩한 자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신데 왜 너만 잘난척하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에 모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 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라는 말씀에서 고라는 봉사의 일을 크고 작은 일로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작은 일, 모세와 아론이 하는 일은 큰 일로 여기고 우리도 너희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무엇 때문에 너희들만 높은 자리에서 우리를 다스리느냐고 반역을 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큰 일 작은 일을 따지게 된 것이다.

결국 고라나 다단 아비람 모두는 모세의 지도자 직이나 아론의 제사장직이 인간 마음대로 가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것임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채 하나님을 찾는 자의 모습이다.

고라가 만약 자기를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는 삶을 살았다면 자신이 맡은 일이 어떤 일이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기쁨과 감사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를 여전히 마음에 둔 채 일을 했기 때문에 모세에게 불평을 한 것이다.

이러한 고라 무리에게 모세는 과연 누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 방법은 아론과 고라 무리 모두가 각기 향을 피운 향로를 가지고 회막문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멸시한 자는 땅이입을 열어서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라고 했다(29,30). 모세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고라의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물건까지다 삼켜 버림을 당했다(32,33). 또한 고라를 추종했던 250명의 족장은 들고 있던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태워버렸다(34,35).

고라일당의 반역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중보자에 의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우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못한 부분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지팡이에 각 지파의 족장들의 이름을, 그리고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게 하신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시는 증거궤 앞에 그 지팡이들을 두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지팡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8절에 보면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라고 한다. 아론의 이름을 쓴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린 것이다. 나머지 지팡이는 그대로였다. 이것이 무엇을 말할까?

마른 나무 막대인 지팡이가 하루 사이에 움이 돋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루 사이에 지팡이에서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일을 통해서 생명과 죽음을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즉 아론의 지팡이만 생명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모습이다는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죽은 자이다. 그것이 너희들의 정직한 실체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두려고 하느냐?'라는 것을 지팡이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죽은 자이다. 아론도 아담의 후손으로 죽어야 할 죄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왜 유독 아론의 지팡이만 살아났을까? 5절을 보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아론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살기 위해서는 아론에게 나와야 한다. 아론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론이라는 인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아론도 같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론이란 인간을 따라간다고 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셔서 아론을 통해서 생명의 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아론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지 아론이란 인간 자체를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손길을 내미신다. 그럴 때우리는 그 손길을 잡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통해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반역했다. 그들은 단지 인간을 바라봤지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생명의 손을 내밀고 있음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하셔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손길은 무엇일까? 아론은 제사장이다. 즉 제사장의 정신 안에 생명이 감춰져있다. 그것은 은혜이다. 저주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이 은혜로 생명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다. 완전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영생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4. 언약의 돌판들

신 10: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

처음의 돌판은 모세가 직접 들고 내려왔다. 그 결과는 돌판이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받은 돌판은 미리 준비한 나무궤에 넣어버린다. 그 이유는 돌판을 그대로 들고 내려오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음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올 때의 이스라엘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즉 여전히 죄인이고 더러운 인간이다. 그렇다면 돌판을 그대로 들고 오면 또다시 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린 것이다. 인간의 죄는 돌판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돌판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겨져 있다. 계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섬김으로 이미 계명을 무너뜨려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 계명이 존재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에 넣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죄는 말씀을 지킴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인으로서 죄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다. 따라서 돌판을 나무궤에 집어넣은 것이다.

8절에 보면 돌판을 집어넣은 나무궤는 언약궤임을 알 수 있다. 언약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 하기도 하고 시은소라고 하기도 한다. 즉 죄를 씻어주는 장소이고 은혜의 자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에 피를 들고 들어가서 언약궤의 뚜껑에 뿌린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돌판을 나무궤, 언약궤에 넣은 것은 '이제부터 너희는 말씀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죄를 책임지고 흘려진 피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지 말고,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설치지 말고 다만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자체가 곧 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5. 세 가지를 넣어 둔 이유

세 가지가 언약궤에 들어있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가 언약궤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언약궤에 넣어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다.

만나가 들어 있는 항아리는 하나님이 먹여 줄 것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죄이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우리는 죽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아론과 같은 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아니면 절대 살 수 없는 죄인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돌판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세상의 우상을 쫓아 가는 죄이다.

6. 그럼, 이런 죄가 어떻게 사함을 받는가?

이러한 죄가 제물의 희생의 피로 깨끗게 됨을 제사와 제물의 피를 언약궤 위에 뿌림으로 보여주신다. (제사를 드릴 때 그 언약궤에 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

언약궤는 하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

7. 언약궤에 재한 잘못 된 인식의 결과 (삼상 4장)

당시 이스라엘은 언약궤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만을 두고 어떤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언약궤를 자신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다. 언약궤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자신들을 도와주신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믿었다.

결론: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나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함께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지성소 언약궤 등과 제사장의 희생 제사에 대한 의식과 절차 등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지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는 자연히 쇠퇴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버리는 미신에 빠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시는 이유를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대신 언약궤를 앞세워서 자신들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는 악한 의도만 드러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서 있다. 언약궤가 보여주는 것은 언약궤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가 과연 누구의 죄 때문에 뿌려지는 것인지를 피로써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언약궤를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 된 모습과 동일하다. 이러한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은 블레셋을 내세워서 그들을 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이다. 곧 그 이스라엘이 우리이다.

언약궤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블레셋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블레셋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온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신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으로 왔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이 온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약궤를 신의 힘을 발휘하는 효능이 있는 궤로 보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동일했다. 그래서 블레셋은 두려워하지 말고 대장부답게 나가 싸우자고 스스로를 독려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삼만 명이 죽고 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게 된다. 언약궤를 믿었지만 전쟁은 패하고 궤는 빼앗기고 제사장은 죽었다.

이것은 언약궤가 있으니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해서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이 믿어야 하는 것은 언약궤가 아니라 제물의 피였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식이나 행함들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덮으신 예수님의 피이다. 만약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고 교회 안의 여러 가지 것을 믿는다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일을 잘 되게 하고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믿도록 하는 데 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넘어져도,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주님의 일은 이루어졌음을 믿고 살아가도록 우리를 고쳐 가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때로 우리에게 괴로움으로 남을 수 있고 짐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우리의 모든 죄를 홀로 지신 주님을 생각하면 감당치 못할 짐이 없다. 주님에게 내 짐을 내려달라고 가볍게 해달라고 해결해 달라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신 짐을 나도 같이 지고 가게 해달라고 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