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누가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가? - 누가복음 10:25-37

차작가 2023. 11. 23. 13:09

1.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 했다.

25절 "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다는 것은 율법 교사는 이미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알면서도 예수께 질문을 했음을 의미한다. 평소 율법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예수라는 사람이 또 다시 율법을 무시하는 답을 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곤란에 빠뜨리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생의 길은 오직 율법 안에 있었다. 율법을 통해서 영생에 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구든 율법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영생의 길로 제시한다면 유대 사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했다. 율법 교사가 바로 이것을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보면 율법 교사는 영생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실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 교사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2. 예수님의 답변

26절"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

3. 여기에 율법사의 답변

27절"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레 19:18) 십계명을 이야기 하지 않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이야기 함.

4. 예수님의 결론

28절"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5. 율법사의 답변에 대해 예수님은 옳다고 인정하신 것인가?

1) 율법사의 문제점은?

영생은 실천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신 6:5에 대한 하나님의 진의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한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에 관심 두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맡겨진 실천적인 문제로 보면 안된다. 즉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만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려고 애쓴다면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말 것이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신앙에 낙심하고 지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쓰다 보니까 해도 해도 끝이 없게 되고 결국 낙심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함께 하실만하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씀에 거하지 못하고,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쁨은 보지 못하고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그 결과를 가지고 기쁨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들을 누리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 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신자이고, 이런 감사로 사는 것이 신앙의 맛이다.

그런데 신자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조건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힘들게 한다. 이런 신자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될 때 '감사'라는 말이 나오고 뭔가 부족하고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감사'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살 돈 5:18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한다. 즉 감사는 모든 일에서, 어떤 경우에서라도,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을 잘못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알 때 감사는 자연히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때 저절로 감사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때 사랑하게 된다.

자기 힘으로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기에 힘쓰라는 말이다.

신자가 '나는 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도 '지옥 가기 때문에'가 아니고 '징계를 받을까 봐'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구원받은 신자의 상태이고, 인생의 참된 맛을 알고 신앙의 맛을 아는 신자인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율법이 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신 6:5절의 말씀은 법적인 차원에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안 하겠다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은 행동은 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말씀을 지킬 수 없다. 지킬 수 있는 게 없다.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대신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과연 이런 하나님의 진의를 알고 답변을 했을까? 그의 두 번째 질문을 보면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이웃에 대한 질문의 의도는?

이 물음의 의도는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사실 율법 교사에게 이 같은 질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 교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괜찮은 인간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이웃이 누군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신 것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7. 이 예화의 결론은?

누가 이웃인가에 답변은 자비를 베푸는 자가 이웃이다. 누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인가? 자비를 경험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다.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라고 묻고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한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주관하고 수종드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피하여 갔고, 유대인들이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다’라고 말한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비가 없는 매정한 사람이 되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싫어서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율법교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의 현실이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질문하는 그 때부터 이미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려고 했다. 율법교사가 비록 영생의 문제로 질문을 했지만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대해 알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강했다. 그래서 율법교사가 말한 율법대로 행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웃의 범위를 묻는 것이다.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의 한계를 어떻게 확정 지을 수 있는지 말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 교사,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개념이다.

이웃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도와주는 것을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실천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율법 교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율법으로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랑이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가서 도와주는 그런 수준이겠냐는 것이다.

영생은 우리의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행하면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영생을 얻은 자는 없다. 이 말은 누구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규례를 행할 수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들여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규범으로 자리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으로 작용하게 될 뿐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율법교사에게 이웃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 자기 동족이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이웃과 원수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이웃이되어주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웃의 범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마리아 사람에게 강도 만난 사람은 자신을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유대인이었다. 일반적인 이웃에 대한 개념으로 대한다면 도와주지 않고 지나쳐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오직 강도 만난 그 처지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겼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에 자연히 행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간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제사장, 레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은 같은 동족이기에 일반적인 이웃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서로 이웃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다가가면 자신이 귀찮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이웃은 인간관계에 의해 고정된 어떤 대상이 아닌 것이다. 같은 동족이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고 해서 나의 이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율법 교사와 같은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그리고 자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출발한다. 그렇게 보면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단지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도와주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자비를 베푸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불쌍함은 그가 처한 형편과 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게 된 것처럼, 인간의 실상이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죽어야 할 처지에 있다는 것이 불쌍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감사하는 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이웃이 되는 것이다.

 

결론: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누가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을까?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그 자비를 베푸는 성도만이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