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진정한 이웃(형제) 사랑 - 로마서 14장 1~9절

차작가 2023. 12. 31. 11:25

우리가 시기하고 경쟁하고 다투고 욕하고 미워하게 되는 그 모든 사건들 속에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악함이 담겨 있다. 따라서 이웃의 관계에서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되는 신자야말로 참으로 지혜 있는 신자이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간섭을 제대로 이해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웃이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이상, 이웃은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경쟁과 다툼과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본문의 말씀도 이웃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은 현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크게 실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 문제로 인해서 다투거나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같이 중요하지도 않는 문제들이었는데 불구하고 결국 싸움과 다툼과 비판으로 번질 때가 많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멀어진 채 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경: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절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절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절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해석:

1.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 대해 어떤 배려를 해야 할까? (1절)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만약 우리 곁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다른 말을 하는 형제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개의 경우 쉽게 그의 틀린 것을 지적할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고 이것이 맞는 것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학교로 전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맞는 지식을 가르치고 틀린 지식에 대해서 바로 고쳐주면 된다. 그것이 학교의 기능이다. 만약 교회가 학교로 전락된다면 학교처럼 틀린 것에 대해서 지적을 하고 고칠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지는 보지도 않고 다만 '잘못되게 알고 있으니까 네 믿음도 잘못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판단해 버릴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2. 1절에 대한 예로 바울은 연약한 사람에 대해 어떤 예를 들어 설명하나? (2,3절)

"먹는 것"

믿음이 연약한 자가 의심하는 것을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음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당시 음식으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에 보면 율법에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먹을 수 있는 정결한 음식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음식을 구분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구분된 정결한 삶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신자로서의 정결한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음식의 규례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 당시 교회에는 부정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안 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옛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음식을 가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었다. 이로 인해서 교회에 서로 다툼과 비판이 발생을 하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문제로 삼아서 형제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음식을 무엇이든 먹는 자든 구분하는 자든 서로가 판단과 비판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3절)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받으시는 것은 음식을 무엇이든 먹기 때문이 아니다. 또 음식을 가리기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니다. 주일을 지키기 때문도 아니고 날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받으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받으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의롭다 여김 받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음식을 가리느냐 날을 구분하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네가 주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뿐이다. 그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곧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이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거부하실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행함을 보지 않으신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행함을 보고 비판을 하고 판단을 한다면 믿음을 행함의 차원으로 바꿔버린 것임을 알아야 한다.

4. 연약한 자를 세우시는 권능은 어디에 있을까? (4절)

"주께"

하인의 서고 넘어지는 것은 주인에게 있다. 이것은 성도의 믿음은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지 우리들의 간섭과 가르침으로 인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내가 저 사람을 세워 놓으려고 할 때가 많다. 이것이 곧 남의 하인을 내가 판단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믿음이 연약하다면 그를 세우실 분은 우리가 하니라 하나님이다. 우린 단지 주님에게 사랑을 받았은즉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가면 된다. 이것이 교회이다.

5. ‘날(one day)’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본문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음식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또 날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떤 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음식을 먹어도 된다'라거나, 날을 지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음식을 먹고 안 먹고 날을 지키고 안 지키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따지고 비판하기를 좋아한다. 서로 자신의 말이 맞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경도 모르고 예수도 모른 자로 취급을 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주님의 생각에 의해서 내 생각이 다스려지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6. ‘날’이나 ‘먹는 것’에 대한 중요한 관점은 무엇일까? (6,7절)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가 아무리 날을 구분하지 않고 음식을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할 사람인 것이다.

즉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그것을 자신의 의로 여긴 다든지 복의 통로로 여긴다면 그는 믿는 자가 아니라 불신자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의로 삼는 것에 있는 것이지 음식을 구분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형제들의 행동을 보지 않는다. 그가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볼 뿐이다. 성도란 서로 사랑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행함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음식과 날을 구분하는 자를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7. 우리 인생은 누구 것입니까? (7,8절)

"주의 것"

이 말씀은 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질적인 평가 기준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신자로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의 질적인 평가는 무엇일까? 거의 모두가 교회에 대한 행함을 말한다. 교회에 어떻게 했느냐에 의해서 신자로서 얼마나 질적으로 훌륭하게 살았느냐가 결정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교회에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결국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삶을 교회를 위하여 살고 죽는 삶으로 대체하여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에 대해서 혼란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보이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에게 뭘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위해서 하는 것인지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단지 말로만 주님을 위해서 살자는 외침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있다. 그것은 주님에게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몸을 주님에게 산 제사로 드린 자로 살아갈 때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에게 속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게 된다. 그것은 '나는 주님에게 속한 자다'라는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모든 행동이 '나는 주님에게 속한 자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신자에게는 오직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행동이 있다. 그 행동은 주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스스로 의도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해야지'라는 계획 아래서 행동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보이게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바로 '나는 주님이 흘리신 피의 은혜로 천국 간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입술의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이 이 고백을 기초로 해서 된다.

그 한 예로 음식과 날의 문제를 가지고 형제가 서로 비판하거나 판단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 얻었음을 입술로는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함을 근거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행함도 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면 함께 그리스도의 몸 된 모든 지체 역시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은 형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행함을 보지 않듯 형제들의 행함도 보지 않아야 한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말씀은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세우기 위한 삶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삽니다'라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고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문제가 마치 우리에게 행함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주님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간섭하신다.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되시는 표징이고 능력이다.

8.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유는? (9절)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못한 자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서 산 자이며 속하지 못한 자는 생명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죽은 자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의 주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고 살아나셨다.

죽은 자의 주가 된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심판해 버리시는 것이 곧 주되신 그리스도의 권세이다. 그리고 산 자의 주가 되시기 때문에 산 자들로 하여금 주의 것으로 주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신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결국 주님을 증거하는 몸으로 세상에 보내졌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며 주되시는 분임을 증거하라고 있다. 항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그 어떤 행함도 생명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주님이 흘리신 그 피만이 나의 생명임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삶이다.

적용:

우리가 이웃의 행함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우리의 구원도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판단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곧 나의 의를 드러내고 주님은 사라지고 내 안에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죄를 짓는 것이다.

많은 율법의 조항 중에 하나만 어겨도 죄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나는 가장 쉽게 실수하는 죄가 바로 이 부분인 것 같다.

그동안 많은 교회의 지체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나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니가 목사 아들이야! "

"누구는 담배와 술을 한대...ㅉㅉㅉ"

" 성경 구절 하나도 모르는 게 과연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어! "

"선교사로 네가 간다고! 애라이~~~"

"장로가 십일조를 안 한다고!"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았을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 유행가나 부르고,,,,"

"헐... 목사가 새벽예배를 안 하네?"

참... 부끄럽지만 다 내 마음속의 판단의 소리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구원받았네 안 받았네... 평가하며 사람을 대했었다. 나는 마치 완벽 자체인 것처럼... 조금 철들고 나니 한없이 부끄럽다. 내 안에 하나님처럼 앉아 있는 높아진 나의 모습이 가장 가증스럽고 추악한 죄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런 나를 회개한다.

그리고 부족한 나를 그래도 용서하시고 많이 봐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