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이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 로마서 13장 8~14절

차작가 2023. 12. 30. 12:31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라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절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해석:

1. 어떤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말아야 할까?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롬 1: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는 말을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입은 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이 구원받을 만 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부름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에게 빚을 졌다는 말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는 서로가 사랑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로 살아갈 책임을 진자이지 사랑받아야 할 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그것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셨다. 그렇다면 우린 모두 그리스도에게 사랑의 빚은 진자들이다. 빚을 졌다면 갚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이다.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그 사랑에 보답한다고 할 때 많은 사람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예수님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한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 보는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를 구원한 것도 목사가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린 것도 아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시고 희생하신 사랑을 베푸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나 목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 앞에서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2. 모든 계명은 어떤 말씀 안에 다 들어있을까? (9절)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구약에는 수많은 계명이 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을 하나하나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많은 계명은 단 하나로 모아 버리신다.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 안에 구약의 수많은 계명이 들어 있다.

사랑이 있으면 자연히 그 계명은 지켜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는 계명을 잘 지키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 계명이 목적하는 것은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있는 사랑 아닌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계명이 주어진 배경은 그들이 애굽에서 인도함을 받고 나온 것에 있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아나고, 홍해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어린 양의 희생의 피였다. 이스라엘이 살아날 가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은 어린 양의 피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 이것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이다.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도 계명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계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계명을 통해서 자신들이 결코 살아날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님을 새롭게 인식을 해야 한다. 홍해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애굽 군사들과 이스라엘이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자연히 어린 양의 가치가 사라지게 된다. 어린 양의 가치는 죽어 마땅한 자를 살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죽어 마땅한 자로 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들 그것은 단지 의식일 뿐 이스라엘 안에 어린 양의 피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간다면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 증거는 이웃을 통해서 보이게 되는 것이다.

 

3. 사랑의 특징이 무엇일까?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웃이 악을 행한들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다.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이웃에 대해서 그 사랑이 증거 될 수밖에 없다. 사랑에 지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랑을 해야 할 자와 할 수 없는 자로 구분할 수도 없다. 만약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런 구분을 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 얻을 자는 없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역시 이웃에 대해서 구분을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이루는 삶이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아느냐이다.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알게 된 자는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 이웃을 대할 때에도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게 된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고 율법을 완성한 삶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일이 잘 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남아 있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지금은 어느 때 인가? (11,12절)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11절 말씀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말씀은 '이제 자지 말고 깨어나라'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만약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의 가까움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간다면 그는 '이 시기'를 아는 자이다. 시기를 안다는 것은 자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시대의 위기를 아는 자임을 뜻한다. 시대의 위기란 무엇일까? 12절에서 말씀한 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것과 같은 의미의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적이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자가 누구일까? 회개하라고 한다고 해서 회개할 사람들일까? 회개란 오직 천국이 가꿔옴을 아는 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다.

5.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의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12,13절)

1)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이나 어두움이라는 것은 윤리 도덕이 타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오신 분을 배척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이다. 이런 시대 속에 우리를 남겨 두신 것은 어둠의 세력 안에서 빛으로 살아라는 것이다. 빛으로 살라는 것 역시 좋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시대에서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겨 놓으신 것이 신자인 것이다.

2)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밤이 되면 나쁜 행동에 대해서 안심을 하게 된다. 밤이라는 조건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낮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밤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삶으로 생각할 수 있고, 낮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는 것은,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을 할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단정한 행동이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 호색 쟁투 시기라는 것들은 전혀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에서 나타나는 것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탕하지 말고, 호색하지 말고, 술 취하지 말고, 쟁투하지 말고, 시기하지 말라는 말씀 등은 우리에게 그렇게 실천하라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는 것이다.

3)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지금까지 모든 말씀의 결론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 자이다. 이 시기가 어떠함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갈 때 가능하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단지 몸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가죽옷이든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것이든 차이가 없다. 그런데 굳이 인간이 만들어 입은 옷을 벗기시고 하나님이 해주신 가죽옷을 입히시는 것은, 죄의 결과로 발생한 수치는 너희들의 손으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가려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죽옷은 신약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죄악의 수치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수치가 가려진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그리스도가 우리의 옷이 되었기 때문에, 신자는 다른 것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수치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수치이다. 이 수치가 무엇으로 가려질까? 우리의 죄를 세상의 무엇으로 가리겠다는 것일까? 수치는 오직 그리스도로 가려질 뿐이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수치가 가려짐을 알고 세상 것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어둠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빛은 증거 된다.

적용: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이며 누군가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그 사랑에 감사한다면 삶을 통해 이웃에게 나타나야 될 것이다.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에게나 가족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의 태도도 아닐뿐더러 사랑의 빚진 자로의 삶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이 세상에 남겨 놓은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깨어 있어야 하고 어두움을 벗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보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