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지체를 사랑하는 방법 - 로마서 14장 10~15절

차작가 2023. 12. 31. 11:26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리라

11절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끓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절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절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절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해석:

1.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 여길 수 없는 이유는? (10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심판대는 죄인을 판단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이라면 심판대는 피할 수 없는 자리이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입었기 때문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라는 판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분상 의로운 자라는 뜻이지 행위 자체가 의로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는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

사도 바울이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것을 책망하는 근거는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설 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바울은 앞에서 음식과 날의 문제를 예로 들어서 형제가 서로 판단하지 말 것을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우리가 음식을 구분했는지 아니면 날을 구분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살았는지를 판단하는 자리인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형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다. 나 역시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다.

마 7:1-2절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비판한다면 그 비판으로 인해서 내가 비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형제를 비판할 때, 그것은 결국 내가 형제와 똑같이 심판대에 설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2. 모든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무엇을 하게 될까? (11,12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이 말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될 의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자가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일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심판대이다. 이처럼 나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자고 내 죄를 말해야 할 처지에 있음을 알 때 형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허물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기고만장해지는 경향이 있다. 결국 눈에 보이는 형제의 허물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들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보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마치 자신이 의인이 된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된다. 살인하고 사기 치고 도둑질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심판대에 서게 되면 그나 나나 똑같이 무릎을 꿇을 자에 불과할 뿐이다.

9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형제의 주가 되는 분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내가 비판하고 업신여기는 그 형제의 주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형제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산 것처럼 형제에게 너무나 쉽게 비판을 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오직 주님만이 삶과 죽음 위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심판자이시다. 따라서 심판대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구별이 없다.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가 없다.

우리 자신의 경건을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경건을 보인다고 해도 역시 결과는 심판대에서 무릎을 꿇을 자이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나 자신의 경건과 복음을 도구로 삼아서 형제를 비판할 때가 많다. 그리스도가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서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경건이 곧 우상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함을 포기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행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쉽사리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자신의 경건을 내세우면서 형제와 구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심판대는 장차 서게 될 자리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리 심판대에 선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 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볼 때, 내 앞에 있는 형제 또한 내가 판단하고 업신여길 수 없는 귀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3. 지체들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은, 우리의 판단이 오히려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고전 8:8절의 말씀을 보면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자유함이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의 믿음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더럽다고 말하는 것을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의 믿음은 형제의 유익을 위한 믿음이었지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것을 내세우는 믿음이 아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형제란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관계이지 음식을 구분하느냐 구분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된 관계가 아니다. 신학을 따져서 나와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은 형제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형제가 아닌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기준 되어서 편을 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형제,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관계는 서로 도우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지 무엇을 지키고 안 지키는 문제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형제가 서로 일치되는 것은 오직 삶의 방향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증거하고 주님이 가신 길로 나도 함께 행하려고 하는 것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세우지 못하는 쓸데없는 것에 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거치는 것을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형제와 함께 나아갈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형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4. 세상엔 속된 것(unclean)이 없는데 어떤 사람에겐 속되게 될까? (14절)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애당초 속된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속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부정한 음식을 속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속됨의 문제로 남는 것이다. 이것이 약한 자이다. 그러나 인간이 부정한 음식을 구분해도 속되고 구분하지 않아도 속되다면 형제가 속되다고 한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딤전 4:4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딛 1:15절에서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 모든 것이 깨끗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다는 강한 자의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이 깨끗하다 모든 것을 먹으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 편에서만 살아가는 사도바울의 참된 입장이다.

더러움은 식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하는지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문제시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문제시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제로 하여금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갖게 한다면 그것은 형제를 거치는 것이고 망하게 하는 것이며 결국 사랑으로 행하지 않은 결과라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 자신의 것을 내세우고 주장하지 말고, 어떤 경우에서도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시길 바란다. 형제를 대할 때도 우리의 앎과 실천을 기준으로 세우고 대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라는 은혜에 서서 대하시기 바란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보이는 것은 형제 사랑일 것이다.

5.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만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나? (15절)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지금까지 우리는 식물과 날을 구분하는 것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살펴봤다. 문제는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업신여기느냐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업신여긴다. 음식과 날을 구분한 사람은 구분하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은 구분하는 사람을 서로 믿음이 있니 없니 판단하면서 그가 아는 바에 대해 판단을 해버린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먹는 것이 옳으냐 먹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면 그리스도가 그를 무시하지 않았고 업신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실 때 그 무엇도 따져 묻지 않으셨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린 모두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의 대신 죽으심에 있는 것이지 성경을 많이 알고 뭔가를 구분하고 구분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면, 우리 역시 형제에게서 찾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닐까? 누구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애쓴다면 그는 음식을 구분하든 구분하지 않든 주를 위해서 사는 자이고 결국 한 지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해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사이다. 그러나 분별이라는 것도 사랑과 함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남을 분별하라고 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라고 주어진 지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판단은 자신에게 향해져야 하는 것이지 형제를 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격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6. 형제 사랑의 최소한의 자세는 무엇일까? (15절)

"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날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몸에는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함께 존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나'가 아닌 '몸'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말씀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형제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신 은혜가 함께 하고 있다.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스께서 대신 죽으신 형제 또한 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 자체가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신 은혜가 귀하기 때문에 은혜가 함께 하는 형제 또한 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위해서만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지체라고 하면서도 형제를 대하는 것을 보면 형제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지체를 위해서 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용:

우리는 나 자신의 경건과 복음을 도구로 삼아서 형제를 비판할 때가 많다. 그리스도가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되어서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경건이 곧 우상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첫 담임 목회지로 부임을 할 때였다. 목회가 분명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순진한 마음에 기대가 컸었다. 그리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욕도 넘쳤었다. 나름대로 훌륭한 사모의 상을 정해 놓고, 나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며 평신도일 때 이런 사모님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나름의 목표를 정하고 임했던 기억이 난다. 한 달 사례비라고는 $2200정도 하는 부목사 시절 아파트 월세가 아마도 $1200이었던 것 같다. 나머지는 빚이 아니면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생활하는 형편이었지만 주위에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힘도 나고, 그래서 목사님들이 목회를 하나보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 당시 담임목회지가 결정이 되고 부임하기 몇 주를 남겨두고 없는 형편에 새 성경 책을 하나 샀었다. 왠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기도 했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한국처럼 성경 책을 쉽게 살 수 없어서 한국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했었다. 그리고 맨 첫 장에 내 이름을 쓰고 새로운 사역지를 축하하며... 라고 몇 자를 적었었다.

그런데 새 교회에 막상 부임하니 성경 책의 버전이 달라서 내가 가진 모든 성경을 예배시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성경의 내용이 새 번역이라 조금씩 달랐기도 했고 더 난감한 것은 찬송가의 순서가 뒤죽박죽이어서 찬양을 하기에 정말 어려웠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싼 성경을 몇 주 전에 사 놓고 다시 이 새 번역 성경 책을 사기는 경제적으로 무리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형편이 좀 되는 데로 나중에 사야겠기에 예배시간 셀폰으로 성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뒤 한 권사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내가 셀폰으로 성경 책을 보고 찬양을 하는 게 못마땅하셨다며 믿음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질책을 하셨다. 이 문제로 자신의 딸에게 의논을 했는데 딸의 생각도 같았다며 사모로서의 태도도 아니며 믿는 자의 태도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돈이 없어서 새 성경을 살 형편이 못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하며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 권사님의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오늘 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정말 믿음 있는 사람의 태도라면 불편하게 셀폰으로 성경을 보는 이유를 먼저 물어봤어야 하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또 그것의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잘못된 지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른으로서 그렇게 정중하게 물어 보셨다면 당시 다른 버전의 성경을 대부분 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전이라 준비가 안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을 것이고 그리고 권사님으로서 혹시 가능하시다면 하나 선물하는 것도 보기에 좋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몇 달 뒤 그 권사님도 셀폰으로 성경 책을 예배시간 보시고 찬양도 하셨다. 성경 공부 시간에도 셀폰으로 성경을 보시고 찬양을 하셨다. 아마도 어르신들은 눈이 잘 보이지 않으시니 셀폰으로 확대해 보시는 게 편하셨던 모양이다. 권사님의 주장으로 보면 권사님은 믿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도 아니고 권사로서 믿음 있는 태도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참 어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마음속으론... "나에게 그땐 죄송했어요" 라고 한마디만 하셨으면 더 존경스러운 어른이 되셨을걸... 했다.

이것이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니니 그냥 덮어 두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주님만이 삶과 죽음 위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심판자이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그 권사님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살았었다. 믿지 않는 시부모님께 당돌하게"어머님 저는 제사장에 음식을 안 먹어요"라고 말씀드렸었다. 시어머님의 성품이 좋으셔서 " 알았다. 그럼 너에게 안 올라간 음식만 주마" 하셨다. 그리고 음식을 싸주시는 것도 올라가지 않은 음식만 따로 싸 주셨었다. 무엇이 중 한 대....

돌아보면 정말 죄송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마치 나는 그런 걸 지키니 믿음 있는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 식당에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참 당황스럽게도 그분은 직장동료들과 함께 회식 중이셨다.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살짝 취해 계셨고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다. 나는 모른척했지만 다시는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 인연을 끊어버린 것이다. 술 한잔했다고... 그분의 사정도 있었을 텐데... 내가 셀폰으로 성경을 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이처럼 더러움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시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회개하고 사람을 바라볼 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왜냐면 나도 판단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