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한마음 한입으로 하나 됨으로 이웃을 기쁘게 하는 성도 - 로마서 15장 1~7절

차작가 2023. 12. 31. 11:33

14장에서 누누이 강조한 대로 음식을 구분한 자와 구분하지 않는 자의 그리스도가 다른 것이 아니다. 음식을 구분한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구원받았음을 알고, 음식을 구분하지 않는 자 역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인해서 구원받음을 안다면 그 둘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형제이며 지체이다. 그러한 관계가 단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의 차이로 인해서 깨어진다면 그 둘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식 안에 갇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신앙이 경쟁이 된다면 항상 살피는 것은 누가 나보다 잘하고 못하느냐이다. 이러한 마음에는 다른 사람의 연약을 내가 담당하겠다는 마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강한 신앙으로 보이는 자에 대해서는 시기와 미움으로, 자기보다 약한 신앙으로 보이는 자에 대해서는 무시와 업신여김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대해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한다고 하면서 정작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탄이 소위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

1절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절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절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절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절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해석:

1. 믿음이 강한 사람의 의무는? (1,2절)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강한 자라면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진심으로 내가 죄인임을 안다면 그에게서는 내 죄를 담당하신 주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은혜의 능력으로 인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강한 존재라면 그것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주어진 강함인 것이지 결코 약자를 무시하라고 주어진 강함이 아니다. 그것은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깨닫지 못한 것을 담당하라고 주어진 은혜인 것이다.

2. 예수님은 어떤 모범을 보여주셨는가? 예수님이 보여 주신 모범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 (3절)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그리스도는 자기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는 분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 3:17 아들로 아름다운 모습이란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시는 것이다. 즉 자기 기쁨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서 아버지에게 기쁨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으신 예수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면 결국 누구의 기쁨을 위해서 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입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교회란 서로 담당해 주는 관계이다. 서로 담당해 주는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증거 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이다. 설사 애매한 비방을 받는다고 해도 참아야 한다. 나를 비방하기 때문에 나도 같이 비방하고 공격한다면 그 역시 비방하는 자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된다. 왜냐하면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비방에도 참게 되는 것이다.

3절의 말씀은 시편 69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함이었다.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신자라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오해와 비방 속에서 인내를 배울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5,6절)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15: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서로 뜻이 같다는 것은 내 뜻과 내 생각이 포기된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가진 뜻에 대해서 상대방 역시 같은 뜻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가지고 한마음 한뜻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으로 한마음이며 한뜻인 것이다.

이것이 없을 때 생기는 것이 다툼이며 충돌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으로는 서로 같은 뜻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야 그 안에서 서로 뜻이 같아질 수 있다.

서로의 뜻이 같은 것, 이것이 바로 형제이며 교회이다. 생각이 같고 성경 지식이 같고 신학이 같아야 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그리스도만으로 감사하고 살아가자는 뜻에 일치되는 것이다.

진심으로 신자에게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한마음과 한 입이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교회에서 한마음과 한 입이 증거 될 때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된다.

4. 그러므로(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았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7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을만해서가 아니다. 진심으로 내가 죄인임을 안다면 그에게서는 내 죄를 담당하신 주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은혜의 능력으로 인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옳으신 분은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고침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완벽한 자는 없다. 형제가 부족하게 보인다면 나 역시 부적한 자이다. 형제가 믿음이 없이 보인다면 나 역시 믿음이 없는 자이다. 이 마음이 온유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주장이나 한 개인의 성경 지식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는 것임을 잊지 말고, 서로의 약점을 담당하고 서로 받으며, 그리스도라는 뜻으로 하나 되어서 한마음과 한 입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

적용:

진심으로 내가 죄인임을 안다면 주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의 능력으로 인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그리스도가 내 삶을 통해 증거 될 수 있다.

평신도일 때는 몰랐는데 사모로 교회에 막상 섬기니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연약하다는 점에 당황했었다. 평신도끼리는 볼 수 없었던 점들을 많이 보게 되기도 했다. 정말 당황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도 많이 경험했었다. 그중에 한 가지는 생각보다 다툼이 많다는 점이었다. 세상에서나 볼법한 일들이 교회에서 너무 많아서 놀랐었다. 차라리 모르고 살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이 나고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을 하나 나누려 한다. 첫 부임하고 예배를 드리던 때를 잊지 못한다. 평균 연세가 70세인 작은 교회.. 뒤어서 보니 흰머리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것도 대략 열명 정도 모여있었다. 그러나 한 4년쯤 하다 보니 교인이 30명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60대 미만의 한 무리가 교회에 등록을 하고 새 신자 훈련을 통해 정식으로 가족이 되었었다.

이 들 중에 장로님 한 가정과 그분의 동생 내외분 그리고 친구분 내외 처남 내외가 오다 보니 원래 있던 교인의 수와 비등한 수가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건 사실 비상이었다. 그전에 두 가정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을 때 아무래도 신경을 좀 더 쓰게 되니 "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둥.." 별말들이 많았기에 오신 분들을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둔다는 느낌을 주면 난리가 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신도가 늘어나면 함께 기뻐하고 환영하고 같이 잘 해 드려도 부족할 판인데... 연약한 성도들이라 뭐... 그러느니... 했다.

그런 뒤 한 2 년이 지나자 이분들도 정착을 하게 되었고 교회의 일도 조금씩 분담하게 이르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뒤에 오신 분들이 가족 구성원들이라 조그만 틈도 사탄이 틈타기 쉬운 각도였다. 이분들이 한편을 먹어 버리면 교회는 분열되기 뻔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멤버였던 성도님들도 목사 쫓아내기로 유명한 사람들로 소문이 자자했고 후에 등록한 장로님과 가족들도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함께 나온 분들이라 노회에서도 "그 교회 6년을 안 넘기고 대부분 쫓아내는데... 괜찮아!" 하며 항상 우리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그 정도로 긴장감이 있는 목회지였다. 그리고 드디어 터졌다. 후에 오신 장로님과 같이 오신 친구 가정이 교회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가톨릭 신자였던 분이신데 조금씩 말씀을 듣고 신앙이 생기기 시작하고 은혜를 받기 시작했었고 특히 재주가 많으셔서 컴퓨터를 잘 사용하시기도 하셔서 내가 그동안 예배시간 담당하던 컴퓨터 작업을 대신해 주시기 시작하시면서 교회에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교회 주소록을 만든다든지 .. 그런 작업도 해 주셔서 감사했다. 그런데 전도로 데리고 오신 장로님이 자신보다 더 주목받기 시작하자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여자 성도님이 항상 내 앞자리에서 식사를 하시고 부활절기 때 새벽예배 후 아침을 같이 먹을 때 나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는 둥 그 장로님의 아내 권사님의 심기를 건드리며 싸움이 붙어버렸었다.

사실 나는 내 앞자리에 누가 앉았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부활절 새벽예배 후 나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는 것도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늘 마지막에 식사를 시작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비어 있는 자리에 앉거나 내가 가방을 둔 그 의자에 앉을 뿐이었다.

구구절절 여러 이유를 말하기도 우스워서 말할 수가 없지만 대부분 이런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두 가정은 반년 넘게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중간에서 중재하는 우리도 곤욕스러웠다.

이 말씀처럼 장로로서 권사로서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성도를 돌봐야 함을 권면 드렸고 그분들에겐 연약함을 함께 덮어주고 오해를 풀기 위해 기도하자고 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분들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나도 그 당시 진심으로 그 장로님 내외분의 연약함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었다. 그분들은 그 사건 이후 오히려 우리를 비방하고 모함했고 결국 기존 교회 멤버들과 우리를 교회에서 쫓아 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를 비방할 사람들이 못된다. 오직 예수님만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를 담당하는 것은 강한 자의 의무이다.

내가 장로니깐 더 주목을 받아야 되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장로님이 전도해서 모시고 온 성도님 가정이 교회에서 잘 적응하고 신앙이 성장하고 중요한 일을 맡기 시작한다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그분이 죄인임을 알았다면 주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넘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장로님은 그 은혜의 능력으로 인해서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 장로님이 정말 예수님을 바로 믿었다면 그와 같은 실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신앙을 떠나서 그 행동은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았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일들을 많이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이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그저 값없이 담당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우리가 약한 자를 어떤 사랑으로 담당하며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