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진정한 섬김과 기도 - 로마서 15장 22~33절

차작가 2023. 12. 31. 11:36

22절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절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절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절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절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3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절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절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해석:

1. 사도바울의 계획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나? (22~25절)

(계획) 1)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너희에게(로마)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3절)

2)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교제)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4절)

(결과) 1)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2절)

2)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5절)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길이 여러 번 막혔다(22절) 여러 가지 상황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뜻이다. 바울이 로마로 가려고 한 이유는 로마의 성도들과 교제하기 위함(24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서바나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이었다.

2.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는? (25, 26절)

"성도를 섬기고 (25절)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성도를 섬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스스로 정해 놓고 그 지역을 목표로 해서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디를 가고자 했든 바울의 마음은 성도를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지역은 언제든지 변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성도를 섬기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느 지역을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섬김이 목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대다수 유대인들이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이방인과의 장벽이 있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으로 성도 된 자들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 10:12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는 말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방인 성도들은 음식의 규례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이 대했다. 할례에 대해서도 유대인들과 같은 의식이 없었다. 이러한 이방인의 믿음을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옳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을 했지만 아직 그들의 의식은 진리로서 자유롭게 된 수준이 아니었다.

따라서 비록 예루살렘의 성도들과 이방인의 성도는 같은 주를 믿는다고 하고 같은 복음을 말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교제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그들의 선민의식이 복음으로의 교제를 훼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이방인 성도들, 즉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성도들이 기쁘게 헌금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구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고, 그 일을 성도를 섬기는 일로 말한 것이다.

3. 사도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갈 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가기를 원했나? (28~29절)

1)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28절에서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라는 말씀에서의 열매도 인간적인 이해관계를 극복하고 맺어진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쁘게 헌금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 성도라면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관계를 쫓아서 행하도록 되어 있다. 때문에 나를 욕하고 미워한 자에 대해서는 같이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이방인들에게서 보인 열매는 그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난 모습이었다. 그들은 억지로, 누가 명령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게 된 구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기쁘게 했다는 것은 그들이 인간관계의 이해를 벗어나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동했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하겠다고 말했다. 복음으로 인해서 맺어진 열매가 어떤 것인가를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확증하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서 보인 열매를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확증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과연 복음으로 살아가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곧 바울에게는 예루살렘 성도를 섬기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인간관계를 따져가면서 사귈 자는 사귀고 멀리할 자는 멀리하는 모습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령이 역사하는 열매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굴레를 벗어버리고 오직 복음만으로 교제하고 대하도록 한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의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하면 서로 배척하는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서 기쁘게 헌금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보인 그 열매를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확증함으로써 복음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우리의 본성으로 인한 열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열매가 서로 서로에게 확증될 수 있기를 바란다.

4.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무엇에 대해 기도 부탁을 했나? (31~32절)

우리가 생각할 때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았기에 결코 자신을 위대한 자로 보지를 않았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그 믿음이 자신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다만 그 일에 부름받아서 쓰인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이었다. 끝까지 자신은 쇠하여지고 오직 주님만 높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니만큼 참된 믿음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위대하게 보지 않는 것으로 증거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본문에서도 나타난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자신이나 로마의 성도들이나 그리스도 앞에서 전혀 다를 바 없는 성도로 여기는 가운데 기도 부탁을 했다.

성도와의 관계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교제하는 것이지 결코 낮은 자가 높은 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서로 기도하는 교제를 가질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이다. 형제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사랑이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실된 모습을 확증시켜주기 위해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한 돈을 가지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은 배신자였다. 실제로 그동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바울 역시 죽일 기회를 많이 엿본 것이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구제한 돈을 잠시 놔뒀다가 나중에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이 편함과 유익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에 따라 움직였다. 오직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달했기 때문에, 지금 역시 이방인들의 헌금을 가지고 속히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확증시켜 줌으로써 복음의 진실된 면을 발견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위태로움 때문에 갈 길을 바꾼다는 것은 바울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2)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라는 것 역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자신이 전해준 구제헌금을 통해서 복음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즉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계속 내세우면서 헌금을 거절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일이 다 끝나고 로마의 성도들에게 가서 함께 편히 쉴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한다.

3)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그런데 왜 기도를 부탁했을까? 그리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오해 때문에 발생하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결코 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자신이 기도한 대로 된다고 해도 그것은 내 기도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기도를 자랑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설사 유대인의 손에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는 실망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하는 신자에게 참으로 필요한 자세이다.

기도란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결국 함께 기도하자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함께 바라보자는 것과 같다.

적용:

바울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스스로 정해 놓고 그 지역을 목표로 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바울은 성도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따져가면서 사귈 자는 사귀고 멀리할 자는 멀리하는 모습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령이 역사하는 열매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굴레를 벗어버리고 오직 복음만으로 교제하고 대하도록 한다. 우리 모두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우리의 본성으로 인한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열매가 서로 서로에게 확증되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그 믿음이 자신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자신은 다만 그 일에 부름받아서 쓰인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이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들의 기도의 요청을 많이 경험한다. 오늘 말씀이 정말 공감 가는 것은 기도를 하거나 전도를 할 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섬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람에 대해 서운하거나 또는 상처로 인해 기도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이 모든 인간의 굴레를 벗지 않고는 기도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결국 성령님이 주신 믿음이 나를 기도하게 했고 인간적인 생각을 초월해 순종하므로 역사는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이 이루시고 우린 쓰임 받는 것뿐이다. 한 예로 교회에서 가장 나를 괴롭히는 일종의 악플러가 계셨다. 무슨 일을 해도 싫어하시는데는 이유도 없었다. 그런 분의 자녀가 유방암에 걸리는 사건이 있었다.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거야!" 하는 말이 듣기 두려운 나머지 그분은 자신의 자녀를 위한 기도도 비밀리 하셨다. 그러다가 우리에게 어렵게 기도를 부탁하셨다.

그런 그분의 상태를 알았기에 우리는 비밀로 했었다. 그런데 나는 정작 기도하기가 힘들었다. 평소에 남편에게 너무 모질고 나에게도 그랬기에 사랑으로 기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님이 나의 마음을 바꾸어 주셨다. 그 딸이 나의 딸이 되게 하셨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그분과 상관없이 그 딸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술의 결과가 좋았고 기도도 응답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 쉬쉬... 하며 왠지 그 딸이 암에 걸린 걸 교인 모두가 아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밀이라 차마 물어보질 못했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에서 전 교인이 함께 연합구역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제일 일찍 오셨기에 음식 하는 걸 도와주려나 보다... 했는데 일찍 온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딸의 일을 소문냈다며 따지기 위해서였다.

나는 온몸이 떨렸다. 엄청난 소리를 지라며 악을 쓰시니깐 평생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했었다.

그날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기에 충격이 더욱 심했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너무 억울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교회의 소문의 대부분이 어떤 집사님으로부터인걸 아는지라 조용히 어떻게 권사님의 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는지 여쭤보았다. 그리고 답을 찾았다. 바로 그 집사님이 권사님의 차를 얻어 타고 가시다가 우연히 전화가 왔고 권사님이 전화로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딸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억울한 누명은 썼지만 권사님께 " 그 집사님께서 그렇게 된 거래요..."라고 목회자는 말할 수도 없다. 말해봤자... 사실은 권사님도 눈치로 알고 계셨다는 느낄 수 있었고... 그저 화풀이였거니... 했다.

사랑으로 기도하는 마음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지만.... 아마도 또다시 기도할 일이 생긴다면 사역자에겐 성령님이 기도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실 줄 믿는다. 왜냐면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비방도 억울함도 감내하며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은 결코 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