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은혜받은 성도의 사명과 삶 - 로마서 15장 14~21절

차작가 2023. 12. 31. 11:35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약점을 담당하심으로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나 구원받았다'는 것을 감사하고 살아간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된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가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받았다'라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모든 공로를 두는 것은 단지 신자 된 자로서의 고백이지 그것을 순종하는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고백할 것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삶에서 증거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증거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한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 실제 십자가에 순종하는 삶이 있음으로 해서 신자 됨이 증거 된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15장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으로 계속 설교하고 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이다. 주님의 은혜가 무엇이며 그 은혜로 결과로 자신에게서 주어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기에 자연스럽게 보이는 결과인 것이다. 은혜를 따라가는 삶을 살려고 하게 되기에 은혜가 증거 되는 삶으로 자신을 순종시키고자 하기에 약점을 담당하고 짐을 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린 이것을 바울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성경:

1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절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절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절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절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절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해석:

1.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15절)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무엇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썼다. 설교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은혜를 서로 나누는 시간과도 같다.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는 삶에 충성하기 위해서 서로 권면하고 주어진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하는 자나 설교를 듣는 자는 서로 동일한 위치에서 주님의 은혜로 교제하는 것이지 목사가 교인을 가르치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설교하는 자는 설교를 목사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설교하는 것 자체를 위대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자는 설교하는 자를 자신과 다른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존재로 인식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를 생각나게 하려고 바울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담대히 썼다는 것이다. 담대히 썼다는 것은 은혜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어떤 계산하에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를 따져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혜란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생각으로 썼다는 뜻이다.

2.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는 어떤 은혜일까? (15-16절)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신 것"

이 구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 바울이 부름을 받은 것은 그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을 말한다.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이방인을 하나님에게 인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제사장 직무는 제사장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씻음을 위해서 존재했다. 즉 제사장의 존재 의미는 죄인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존재 의미도 이방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의 구원이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은 부름을 입을 이유가 없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3. 바울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18절)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말할 것은 오직 이방인을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역사하신 기사와 이적과 능력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그 어떤 기사나 이적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이방인을 순종시키기 위해서 나를 도구로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되어 있는 사도의 고백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에 대해서, 그리고 사도로서 살아가는 모든 일에 대해서 결코 자신의 힘으로 말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도로 삼은 것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에게 순종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며, 자신이 전했던 복음이며 자신이 행했던 일이며,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모든 것도 자신이 잘나서도 아니고 믿음이 좋아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신 성령의 능력이었음을 말한다. 즉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능력으로 된 일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 역시 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누군가를 그리스도에게 순종시키기 위해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순종시키고 복종시키기 위해서 나를 불러서 쓰신다는 것이다. 그 일에 우리에게 여러 가지의 환경과 상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가지고 실망을 한다거나 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모든 일에 자신을 순종시키고자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다.

4.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 만하게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절)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

즉 사도 바울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두루 행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나 열심히 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다만 이방인을 순종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게 됐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 자신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한 것이지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이룬 전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전하는 분도 하나님이시지 결코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다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쓰이고 있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사람이 가지 않으면 복음은 전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로마서 10:14절에 보면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다. 이 말씀은 마치 사람이 가지 않으면 복음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으니까 사람이 가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진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명을 가지고 가도록 하기 위해서 독려하는 말이 아니라, 15절의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을 놓고 볼 때 보내시는 분은 여호와 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이 전하는 자의 입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인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항상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미혹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이란 우리가 열심을 내면 잘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공해야 하나님의 일이 성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성공하고야 마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다.

그런데 왜 우리를 쓰시는 것일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이 실패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한 자의 생각일 뿐이다. 자신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지 않아도 실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도할 필요가 뭐 있는가라는 반발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함께 하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함께 한다는 것은 이미 그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닮아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전도하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지가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으로 된 것이다.

5. 바울이 복음 전할 때 원칙은? (20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여러 목사들이 이 본문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다른 사람이 개척하는 지역에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지 않기를 권면하는 내용으로 이해를 한다. 즉 남의 교인을 빼앗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이해를 한다면 그 사람의 관심은 복음이 아니라 내 교회에 있다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다. 내 교인을 다른 목사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과연 누군가가 교회를 세웠다면 그 지역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의도로 본문을 말했을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 된 것은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함인 것을 알았다.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도 된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복음이 없는 곳에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도되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곳에 바울이 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남의 밥그릇에 탐내지 말라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52:15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왜 복음을 전하는지를 말한다. 21절의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사야 52:15절의 말씀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이 일에 사도 바울을 부르신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일하게 된 것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자세를 볼 때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은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만을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욕심을 개입시키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만 모든 관심을 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이 앞서지 않고 말씀이 가라고 한 그 자리까지만 가는 바울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앞질러 버리는 경우가 많다. 분명히 말씀을 앞지른 생각이면서도 옳은 일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정당화해버린다.

신자는 항상 조용히 주의 말씀을 살피면서 나아가야 한다. 행여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 버리는 것은 없는지 살피면서 말씀이 원하는 자리에서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말씀으로 종으로 살아가는 신자이다.

적용: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잊어선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누군가를 그리스도에게 순종시키기 위해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순종시키기 위해서 나를 불러서 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복음을 전했지만 예상한 결과가 없다고 해서 실망을 한다든지 자랑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성도는 주저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다.

나는 대대손손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 심지어 친척을 통틀어서 예수님 믿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었다. 엄마에게 집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고 학비를 끊으신 적도 있었다. 옷도 가위로 다 잘라버리기도 하셨고 성경 책을 찢어 버리기도 하셨고 공부할 필요 없다고 책도 다 찢어 버리셨다. 방학 때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하면 아버진 큰 기침을 내면서 집안에 종교가 둘이면 집이 망한다는 말씀과 상처되는 말씀도 많이 하셨었다. 그런데도 굽히지 않고 나는 교회에 나갔었고 할머니를 전도해서 마지막에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드려 천국으로 보내드렸다. 그다음 타깃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었다. 함께 대학 다니며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전도를 열심히 해도 교회를 나가지 않았었다. 동생을 위해 기도도 많이 했었다. 이 모든 게 나의 열심히만 되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었고 그 이루어짐을 통해 나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졸업 후 직장 때문에 타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동생과 헤어지게 되었었다. 그 당시 동생은 대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밤 꿈속에 내가 나타나서 누워있는 자신을 측은히 바라보는 꿈을 꾸고 난 뒤 꿈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언니의 눈빛이 자꾸 생각이 났고 평소에도 잠자는 자신의 옆자리에서 기도하는 언니를 생각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언니가 바라는 교회에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도 나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며 부모님처럼 나를 대해 주고 있다. 신학을 할 때도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준 동생이다. 정말 자랑은 아니다. 왜냐면 동생도 나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동생은 섬기는 교회에서 열심히 잘 섬기며 동생이 대표로 있는 회사의 전체 수입의 십일조로 4군데의 단체를 후원하는 아주 신실한 크리스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물론 개인의 수입도 십입조뿐만 아니라 나타내지 않고 물질로도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현제 나보다 훨씬 신앙생활을 잘 하는 동생을 보면 기특하고 이쁘다. 즉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능력으로 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다. 복음이란 우리가 열심을 내면 잘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실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성공해야 하나님의 일이 성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성공하고야 마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믿지 않는 부모님과 오빠 가정을 두고 기도는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해야 된다는 강박감에서 자유롭다.

기도하며 전도하면 하나님 때에 이루실 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