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문안 및 마지막 당부 - 로마서 16장 1~27절

차작가 2023. 12. 31. 11:37

교회에서의 성도의 관계가 한 몸으로 일컫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다. 다 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며 한 몸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알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산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산다면 그 은혜는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이 나누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은혜가 서로 나누어지는 현장이 교회이며 이처럼 나눔이 실천되는 교회에서라면 경쟁과 다툼과 시기가 보일 리가 없다. 이것이 곧 믿음으로 인해서 증거 되는 믿음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행함이 아닌 믿음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성도란 서로 받아들이는 관계이며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관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장의 말씀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을 때 16장의 말씀은 소홀히 여기게 될 것이다. 16장의 말씀을 보면 계속해서 '문안하라'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

성경:

1절 내가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절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절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절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7절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절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절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이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절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12절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13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14절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15절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16절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절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절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1절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2절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23절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절(없음)

25절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절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해석:

1. 사도바울이 다움의 각 사람들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문안하라고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 (1~51)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자매 뵈뵈: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바울은 자신이 로마에 가기 전까지 믿음이 약한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서 겐그리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자매 뵈뵈를 로마로 보내겠다고 한다. 이러한 당부를 하는 이유는 바울 자신이 천거해서 로마로 보낸 뵈뵈가 로마의 성도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경우를 염려한 것이다.

바울이 뵈뵈를 천거해서 로마로 보낼 때 로마의 성도들은 뵈뵈에게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자신들이 의지하고 존경하는 바울이 천거한 사람이기 때문에 특출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 막상 만났을 때는 상대적으로 기대했던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자연히 그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게 되고 배척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뵈뵈를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고 당부한다.

성도가 서로 무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단지 인사하는 차원의 문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서로 만나는 관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문안할 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가를 언급한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일을 언급함으로써 서로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관계임을 확인하라는 의미이다. 동일한 자로서, 누구나 똑같이 죄인으로서 주님의 은혜와 희생이 아니었으면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만나기 때문에 은혜와 희생 아래서는 인간의 구분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교회이며 성도는 이런 관계에서 서로 무난하는 것이다.

2. 2절에서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주 안에서의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은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강조한 말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믿음으로 모인 교회는 편견이 없고 외적인 조건으로 인해서 서로 구별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닌 서로 용납하는 관계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성도가 함께 했을 때 나타나야 할 예절은 외적인 조건을 따지며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형제로 대하며 그가 약한 자일 때 그 약점을 담당하고자 하는 것이 곧 성도의 예절이다.

때문에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스스로 판단하면서 '믿음이 왜 그 모양이냐?'라는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한 개인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 즉 몸을 보신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을 보시면서 누구의 믿음이 강하고 누구의 믿음이 약한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섞여 놓으시고는 교회가 어떠한가를 보신다. 즉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같이 나아가는 교회인가 아니면 약한 자가 강한 자에 의해서 판단을 받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가를 보시는 것이다.

교회는 개인의 신앙이 특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함께 자라가는 관계이다. 개인과 개인이 믿음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내 믿음이 강하다면 그것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그 짐을 나누어지라고 내 믿음을 강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인정하고 약한 형제를 대하는 것이다.

교회는 서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서로가 채워감으로써 온전함을 증거해야 하는 관계로 모이는 것이다. 온전함은 개인의 능력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연합으로서 증거 된다. 이런 마음으로 성도를 대할 때 주 안에서 합당한 성도의 예절이 보이게 된다.

3. 바울이 로마의 형제들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것은? (17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오직 은혜만을 말할 때 반발하는 자들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이다. 오직 은혜 아래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묵살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쌓은 업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적인 은혜에 대해서 부정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도 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은혜는 자신에게 업적을 남기게 한 은혜이지 죄인 된 자신을 죄에서 건지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며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떠나라고 한다. 대적하라는 것이 아니라 떠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과의 사귐이 있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즉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떠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고 분쟁을 일으키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못하고 그 행위를 근거로 해서 뭇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고 높임을 받고 싶어 하는 악한 성품으로 인해서 교회를 훼방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러한 악한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으로 성도가 서로 무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자신의 속에 구별이 있을 것이고 나보다 행함이 적은 자에 대해서는 차별과 무시가 존재하므로 은혜와 사랑 안에서 문안할 수 없다.

신자란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자이다. 내 속에서 내가 주인 되려는 악한 성품이 보일 때 그것으로 애통해 하면서 회개하고 주님을 찾아 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모습이다.

4.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은 어떤 악한 일들을 하나? (18절)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이 같은 자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 내세우며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이다. 자기 배를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즉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우리의 행위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를 말하는 한 우리의 행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로 신자를 미혹하는 것이다.

어떤 교훈에 대해서 신자가 미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 교훈이 인간에게 어떤 편함과 자유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뭔가 득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기보다는 자신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받는 미혹이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나 주안에 있으면 어떤 행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나 둘 다 똑같이 자신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사도바울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25~26절)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16: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그러므로 복음을 비밀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비밀의 계시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 다. 하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비밀의 계시를 전했다. 과연 바울이 전한 것이 무엇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할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부터 인간에 대한 무능력을 말한다.

이방인은 만물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에게 감사치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죄인이면서도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것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유대인의 죄이다. 은혜 아래 거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동일하다. 이방인도 자신들이 선을 행하면 그 선의 공로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 역시 율법을 지키는 자신들이야말로 유일하게 구원을 얻는 자임을 자신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된다. 그 어떤 인간의 행함도 구원에 도움이 되는 의가 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 과연 인간의 전적 무능력에 대해서 누가 순순히 믿으려고 할까? 인간이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선이 될 수 없다는 선언에 대해서 누가 과연 '아멘'하고 응답을 할까?

사도 바울은 인간의 무능력을 말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한다. 구원에 있어서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의가 되시는 분위기에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행함으로 천국 간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것을 아무나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인간에게 선의 가능성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성령이 임하면 행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철저하게 성령이 행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된 일이기에 내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공로로 주님의 공로로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다.

결국 신자는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자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다시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6. 로마서 마지막을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마치나? (27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16: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로마서를 마치면서 우리 다시 한번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점검을 해보자.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은혜가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증거 되고 있는가 살펴봐야 한다. 은혜를 아는 우리에게서 형제에 대한 미움이 나오고 욕이 나오고 시기가 나오고 경쟁이 나온다면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신다면 은혜를 나누는 관계로 모여져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아신다면 그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모여져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적용:

하나님은 교회에서 한 개인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시므로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같이 나아가는 교회인가 아니면 약한 자가 강한 자에 의해서 판단을 받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가를 보신다. 그래서 우린 약한 자를 담당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에서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며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에게서는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그 의미는, 그들과의 사귐이 있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즉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떠나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고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뭇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고 높임을 받고 싶어 하는 약한 성품으로 교회를 훼방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러한 약한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으로 성도가 서로 문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의에 빠져서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억지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며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경험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교회는 쉽게 상처 입고 성도의 관계는 깨어지는 걸 많이 봐왔었다.

속된 말로 자신이 주걱을 잡고 밥을 뜨지 않으면 교회에서 친교는 시작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생각이 다르면 기다려 주고 또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게 돕는 겸손이 필요하다.

서로 격려하고 사랑으로 섬기기 힘써야 할 것이다.

로마서를 마감하며 생각이 깊어진다. 과연 나에게서 무엇이 보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머물러 살아가기를 위해 난 순종하고 있나? 서로 은혜를 나누는 관계로 교제하고 있나....... 주님을 안다면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모여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