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예레미야 11장에서 20장까지 묵상

차작가 2023. 9. 28. 11:40

오늘은 11장에서 20장까지 묵상했다.

그중에 17장을 나누고자 한다.

17장에는 유다의 죄와 심판 그리고 예레미야의 간구와 그들이 죄에서 돌이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부터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다.

유다의 죄는 나의 죄이기도 하고 현재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죄이기도 하므로 많은 공감을 느꼈다.

17장 1절을 보면

17: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유다의 죄가 마치 금강석의 끝 철필로 기록된 것과 같이 지워지지 않는 죄의 심각성을 말씀하고 있다.

그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단 뿔에 새겨졌다고 표현한다.

제단 뿔은 번제를 드릴 때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는 곳이다.

이 제단 뿔을 잡아서 죄 용서받은 일이 실제 역사 속에 있었다.

제단 뿔을 잡아서 목숨을 건진 인물은 아도니야와 요압이다.

다윗이 왕위를 아도니야에게 물려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서 반역을 했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때 아도니야는 급히 도망가 제단의 뿔을 잡아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또 요압 장군도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나 아도니야도 요압도 그 당시는 모면했지만 결국은 심판을 받았다. 지울 수 없는 죄를 표현한 것이다.

17: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유다 죄의 심각성은 우상 숭배에 있다.

그들은 아세라상을 숭배하고 각종 나무에 절을 하고 모든 제물과 보물을 산당에 바쳤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게 준 기업에서 손을 뗄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킨다고 하신다.

17: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여호와의 저주를 받은 유대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다고 말씀하신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존재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보여준다.

사막에 흔히 있는 떨기나무는 수분이 없을 때 앙상한 가시만 남아 그 나무들끼리 부딪히며 불이 붙어 사그라지는 아주 미약한 존재이다.

이렇듯 종교조차도 타락한 그들의 삶이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황폐한 삶을 말하고 있다.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17: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러나"라고 시작하는 7절 이후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심판받은 그들 일지라도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이 메마르지 않으며 잎이 청청하고 결실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오마는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7: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9절에 "부패한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마음은 썩어버린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부패한 것은 여호와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시고 폐부를 시험하고 사람의 행위와 행실을 그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심장은 생각하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폐부는 즉 콩팥은 양심을 뜻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과 양심을 알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대로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11절의 자고새는 뻐꾸기처럼 탁란하는 새를 말한다.

자신의 알인 줄 알고 열심히 품어 부화하면 열심히 먹이지만 자신의 알은 이미 뻐꾸기가 버렸으므로

결국은 다른 새끼를 먹여 떠나보내는 허무함을 표현한다.

열심히 자기의 욕심을 채우며 살았지만 열심히 쌓아둔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육적인 욕심은 언제나 허무함을 남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영적인 것으로 채워야 함을 말한다.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3절에 "자는 흙"은 죽음을 의미한다.

주님을 버리는 것은 소망을 버리는 것이다.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므로 그 삶은 죽음과 같다.

사람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해봐라!" 하며 조롱했다.

예레밍냐는 그런 조롱 속에서도 자신의 직분에 충실히 임했다.

이 재앙을 자신도 원하지 않아서 갈등했지만 하나님이 예언을 선포하게 하셨으므로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 예언은 유다의 멸망이므로 자신도 갈등했고 하나님과도 갈등했고 유다 민족들과도 갈등하게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면 내가 낫게 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드 고난 즉 재앙 속에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자신이 당한 치욕을 그들도 당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배나 되는 멸망으로 갚아 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19절에서 27절은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 모든 재앙을 피하는 길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버렸다.

그들이 그 욕심을 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채우는 길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부터가 시작이다.

주일은 즉 안식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재현하는 날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회복을 시작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정신은 삶에 큰 영향을 준다.

안식일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은 여전히 육의 욕망을 채우는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구별되는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집안에서 일하는 종과 짐승들까지도 안식일에 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욕망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신뢰가 회복되는 시작이 된다.

그들이 안식일을 구별할 때 하나님은 25절에서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라고 말씀하신다.

17:2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 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성문에 불을 놓고 예루살렘의 궁전을 삼키고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하시는 심판을 말씀하신다.

결국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다른 제단을 쌓고 또 지키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형식적으로 지킬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하고 사막의 떨기나무같이 사그라지며 자는 흙과 같이 죽음이 오고 그들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 보응하시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의 부패는 그들을 삼킨 것이다.

예레미야와 같이 우리는 옳은 일을 할 때도 고난이 찾아온다.

그리고 고난이 없는 삶이란 없다.

그러나 그런 고난을 겪을 때 예레미야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리고 그 고난 가운데에 자신을 고치시길 구원하여 주시길 간구했다.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고난이 불행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느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회개를 촉구하는 고난 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잘못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고난이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자리에 사용될 때가 있다.

고난의 자리에 내려갔을 때 그들의 자리로 함께 내려가 그들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 고난은 결국은 축복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