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 - 로마서 8장 12~17절

차작가 2023. 12. 26. 13:16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해석:

1.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의미는? (13절)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책임을 부여한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행실을 죽이는 주도적인 역할은 인간에게 있고 성령은 단지 인간에게 사용되는 도구로 전락되어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편에서 성령을 받아 가지고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라는 말씀은 성령을 줄 테니까 그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한 자는 성령으로 인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의 행실은 하나님이 없는 모든 것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생각 하나까지라도 하나님이 없이 육신을 의지하는 생각이라면 그것이 곧 몸의 행실이다.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이미 행동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가 하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실천을 억제할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욕도 이미 간음한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의미는? (14절)

성령은 우리의 육신을 부인하게 하고 그리스도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신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자식의 진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성공적인 진로를 예시해 주는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자식의 진로에 매어 있는 부모의 욕망을 책망하고 자식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인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인도를 강제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짓는 쪽으로 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성령이 강제적으로 내 몸을 죄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끌고 간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일부 사람들은 '성령이 하신다'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나는 아무렇게나 해도 성령이 책임지겠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끌고 가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사고 자체를 바꾸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이 오심으로서 무엇이 죄악된 것이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셔서 죄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변화된 인간이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인생에 최고로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육신을 죽이고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최고의 가치 있는 분을 스스로 좇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좇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가게 되고 자연히 그 속에서 사랑과 봉사와 섬김과 헌신을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는 비록 자신에게서 사랑과 헌신과 섬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모습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자랑할 수 없다.

이런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며, 이러한 인도로 살아가는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된다.

3.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는 의미는? (16절)

성령님이 함께 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는 필히 그 증거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신자 된 자에게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성령의 증거가 보여야 한다. 9절과 14절을 신자는 성령이 있는 자이고, 성령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육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인도함 받는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16절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는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신자를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세우시는가를 말한다.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는 이 말씀이 성령의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리고 있다

적용:

1.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두려움 없이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그 어떤 죄와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자녀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마음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신다. 때로는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신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자녀답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를 사랑하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르는 자신을 치면서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그가 바로 양자의 영으로 인도받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2.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실 때 그 증거물은 고난으로 드러난다. 어떤 체험을 증거로 생각해 버리면 결국 모든 신자에게서 성령의 증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증거를 받지 못한 신자도 있을 수 있다. 엡 4:4절에서는 성령이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함께 하는 성령님은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라는 뜻이다. 때문에 성령님의 증거가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는 없다. 모든 신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야 하는 증거이기에 자기 체험을 성령의 증거로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마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위에 임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힘이 부족해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힘을 보태주려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성령 받았다는 것은 연약한 신자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제 앞으로 예수님의 모든 것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이다. 그래서 마 4장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도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성령에 이끌렸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삶에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고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면 결국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녀 된 신자의 삶을 채운 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이끄신 성령님이 오늘 하나님의 자녀를 이끄신다면 결국 그리스도가 가신 고난으로 이끌어 가실 수밖에 없다. 성령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성령이 증거하실 때 그 증거는 신자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채움으로써 드러난다. 결국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성령의 증거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한 후사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으로 채우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고, 매 맞고, 창에 찔리고 죽은 외형적인 것을 채우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가 우리 속에 채워지는 것을 말한다. 그 원리가 곧 고난이다. 예수님의 삶과 신자의 삶의 차이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차이가 아니라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원리로 채워진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성령의 증거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고생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고생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도 고난받자'라고 하게 된다. 고난을 착한 일을 하는 고생으로 여기게 된다. 그 고생을 내보이면서 사랑했다고 하고 희생했다고 하면서 설칠 수가 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로 채우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는 삶이기에 그 자체가 고난이다. 그리스도의 원리를 따라가기에 육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