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묵상

손바닥 묵상 3 - 누가복음 11장에서 24장 묵상

차작가 2024. 12. 3. 10:27

예수님이 깨어 있어 준비하라라는 말씀을 등불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 말씀에 베드로가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질문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청기지의 비유를 드시며 다시 설명하신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종들을 맡겨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신다.

양식을 나누는 건 청지기이지만 양식은 주인의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이 소유를 맡길 때는 주인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나는 베드로의 질문이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자신의 역할이 무언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에 내가 불을 던지러 왔노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오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산 소망이 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의 사건이 없다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지 못하신다.

성령님의 역할은 의와 죄에 대한 심판이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꿔 주는 역할을 한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예수님이 이 땅에 불 세례를 주시기 위해 오시는데 이미 성령의 불이 있다면 자신이 할게 뭐가 있겠냐는 말씀이다.

즉 역설법으로 없으니 내가 와야 성령님을 통해 의와 죄를 심판하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꿔 영생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십자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가 이루어지지까지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는 것이다.

모든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답답함으로 표현해 감동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을 십자가로 하나님께 온전히 손종하는 모습으로 보여주셨다.

순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게도...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청지기의 삶도 쉬운 일이 아니다.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린 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인간으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순종으로 충실히 살아내신 것처럼...

예수님이 청지기의 삶을 보여 주셨고

우리를 아시는 주님은 우린 할 수 없음을 알고 우리가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불을 던지로 오신 주님..

성령을 모든 사람이 받기를 간절히 원하신 예수님이시다.

청지기의 삶은 갈등이며 끊임없이 불순종과의 대립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칸타타 연습 중 면전에서 무례한 말을 듣는 일이 있었다.

항상 말없이 앉아 연습만 하다가 나름 마음을 열어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알토 파트 틀린 부분을 말하며 다 같이 자꾸 틀리는 부분의 음을 조금 생각보다 높이 내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 자매는 자신을 지적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옆에서 계속 나를 향해 중얼거리며 불만을 토하는데 일단 나는 얼음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몇 분 뒤 툭툭 치더니 "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이나 잘하세요"라고 말했다.

얼굴을 붉히고 잔뜩 화가 난 모습이 마치 나를 협박하는듯했다.

사람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이라 무척 당황하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서 뛰쳐나왔었다.

연습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서 울었었다.

목회를 할 때 그런 비슷한 일을 많이 당했었다.

그때는 한 번도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마치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를 했었다.

그런데 우는 나의 모습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왜 나는 울음으로 내색을 했는지... 나약한지 자책을 했다.

마음은 울면 안 되는데.. 했지만 흐르는 눈물이 멈춰지지도 않았고 불안감이 높아져서 온몸이 떨렸다.

화장실 문을 열어 문 뒤에 숨어 있었는데 그 모습을 한 자매님이 발견하고 말없이 안아줬다.

그 자매는 내가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한 시간이 지나도 내가 보이지 않아 몇몇 분들이 남편과 함께 찾았나 보다.

그런데 어젯밤까지도 잠을 못 자고 몸에 다시 마비가 오고 힘들었었는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한 영상(네가 해 본 가장 용감한 말이 뭐야? 도와줘""를 우연히 묵상 글쓰기 바로 전에 보여 주셔서

하나님은 그 자매님도 함께 가야 될 지체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운 것은 자책해야 될 것이 아니라 도와달라고 말하는

네가 한 말 중에 가장 용감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포기하지 않겠단 의지이기 때문이다.

울음은 바르게 변한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책할 게 아니라 치유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청지기로 삶을 잘 감당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선 성령님의 도우심과 지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서 답답할 만큼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나누고 싶었던 성령님이신데 아무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도와 달라도 말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가 없다.

아직 놀란 가슴 뛰기도 하고 하루에 몇 번씩 여전히 울컥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께 도움을 구한다.

내가 그 자매와 함께 가자고 말하는 용기를 주시길...

그리고 앞으로 언제나 울고 싶으면 참지 않고 눈물을 흘리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