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묵상

하나님의 진노 - 로마서 1장 18~25절

차작가 2023. 12. 22. 12:07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해석:

1.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인가? (18절)

하나님이 계시다는 진리를 막는 것. (25절-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 경건하지 않고 불의 한 사람.

2.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는 무슨 뜻인가? (18절)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치 않음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려면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된다.

약 1:27절에서 말하고 있다. 경건이란 어떤 모양이나 행동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는 그 마음이라고 말한다. 즉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구제를 한다고 해서 경건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서 진노할 명분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세상은 구제를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 과부를 돌아보라는 것은 자신을 약자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사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피조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건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사는 세상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불의는 무엇일까? 역시 불의를 알려면 의가 무엇인가를 알면 된다. 창 15:5,6에서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도 역시 의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의가 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이다. 즉 믿음이 의이다. 지난 시간에 의인은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을 보여주는 자임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불의함이란 어떤 불의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사는 것 자체가 곧 불의이다.

이와 같이 경건치 않음과 불의는 모두 인간의 행동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인간이 죄가운데 있음을 선언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3.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는 무슨 뜻은? (19절)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에서 나타나는 신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신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신을 찾고 하나님을 찾지만 그것은 결국 신을 따르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인다’는 말은? (20절)

만드신 만물-포이에마(peom이 여기서 나왔다. 시 안에는 원작자의 설계와 의도와 지혜와 능력이 깃들어 있다. 우주 전체가 하나님에 관한 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만드신 만물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겨 놓으셨다는 것이다. (피조물은 눈부신 신학 교본이다) 따라서 인간은 얼마든지 만물을 통해서 신에 대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지만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버림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야 할 이유이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믿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결국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섬기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되고 만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섬기는 것이다.

적용:

현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생활해야 할까?

불경건과 불의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사는 것,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피조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건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사는 세상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불의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사는 것 자체가 곧 불의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앞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잘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봐야 한다. 자연이 시름하는 고통도 가슴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은 창조의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 안에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물질, 자녀, 출세 등의 우상이 되어 버린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살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것들이다. 사라지지 않는 진리 이신 예수님 만이 우리에게 만족함을 줄 수 있다.

늘 나는 하루에 3마일을 걷고 있다. 밖에 나가면 들리는 자연의 소리, 내음을 느끼며 하나님이 얼마나 풍요롭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지 느낄 수 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도 가지의 끝이 마치 찬양하며 높이 드는 손처럼 아름다움을 보며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만물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행복이고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에 보이는 큰 집이나 환경을 보면 사람은 비교하게 되고 비교하기 시작하면 상대적으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어있다.

왜냐면 인간은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물질이자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마음을 둔다면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만물을 소유하는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족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