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16절 내강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해석: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의 뜻은? (16절)
1) 인간 앞에서
2) 하나님 앞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인간과 인간의 비교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분이시다. 더러운 인간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화과 잎을 벗겨 버리고 손수 가죽옷을 입히셨다. 이것은 앞으로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하나님이 가려주시겠다는 뜻이 숨어있다. 결국 그 뜻이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모든 수치와 허물을 가려주는 것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수치와 허물이 가려진 의의 사람으로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자는 결코 복음을 나눌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부끄러워하면서 복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허물을 가렸다는 것을 알기 담대하게 어디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복음만 말할 수 있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첫 번째 전제는 올바른 자아 인식이다.
2.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인 이유는? (16절)
1)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선권이 있다. (그런, 의로움이나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데는 우선권이 없다)
2) 구약성경을 맡은 자로서 우선권이다.
3) 구원이 유대인에게로부터 나기 때문이다. (요 4:22 ~ 이는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남이라)
3.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언급한 이유는? 둘 다 겸손하라는 뜻에서이다. 유대인에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본질이 유대인 것이다.
4.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17절)
1)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가 그 ‘의’라는 개념에 대해 올바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의로운 하나님에 의해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장면. (창 15:1-6)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바로 그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난 널 죽여서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난 널 죽여서 너의 죽음에서 비롯되는 그 하늘의 복을 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생육시키고 번성시킬 것이다’라는 언약 성취의 확약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는 것을 ‘의’라고 한다. 하나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그 언약의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 그것이 의이다. 의는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상태다.
하나님께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당신의 약속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이 무슨 덕스러움과 선한 행위와 선한 의지를 하나님 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아브라함의 수긍의 행위를 ‘의’라고 하셨다.
2) 롬 3:21-26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의 ‘내용’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값없이 받는 것이다. 예수가 의이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의이다. 그분이 하신 일이 우리의 의이다. 우리의 생각이 나 행위나 의지가 의의 기준이 아니다. 그 진짜 의를 붙드는 사람만 의인이다.
칭의 사역(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행위)을 통해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의.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의’라는 속성을 입증하신다’는 진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다.
복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5.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은? (17절) (현대인의 성경)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 견고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오직 아들로 가득한 것을 뜻한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디카이오수네, 의’이다. 그 의가 성도 안에서 일을 하는데 그 의가 성도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어구는 ‘from faith to faith’다. 그 말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게 만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가 모든 인간의 의를 다 부정해 버린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가 성도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육적 자아를 죽여 가시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죽여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벨이 결국 믿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를 다 부정당하고 장렬하게 전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세상의 모형인 가인이 사용되는 것이다.
6.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뜻은? (17절)
하박국서에서 인용을 한 것이다. 하박국은 BC 605년경에 활동을 했던 선지자이다. 당시는 신흥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세계 최강국이었던 앗수르를 무너뜨리고 팔레스타인 쪽으로 남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치셨다.
그러한 현실에 대해 하박국이 불편한 심기를 내 보이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다.
하박국이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내며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야만인인 바벨론을 들어서 때리시냐고 하나님께 항의를 하자 하나님께서 ‘누가 의인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율법 지키고 제사 지내면 의인이냐?’ 아니라는 것이다.
의인은 산 자들을 가리키는데 그 살아있는 의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구절을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행위에서 비롯된 의가 아닌)를 가진 자만 살게 된다’라는 뜻이다. 자기의 행위나 자격이나 소유 등을 가지고 나와서 ‘나 의인 맞지요?’하는 놈들은 다 죽인다는 뜻이다.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의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바벨론이라는 이 세상의 영걸, 용사 들을 들어서 때리심으로 이스라엘의 정체를 폭로시키시고(너희가 바로 바벨론이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영걸 됨, 용사됨이 폭격을 당하여 부수어지고 오직 믿음만을 붙들게 되는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산 자들을 의인이라고 한다는 것을 그 한 구절이 모두 담고 있다.
적용: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아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복음으로 인해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수치와 허물이 가려진 의의 사람으로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을 살아가며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나는 사역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굉장히 부끄럽다. 교회는 규칙을 어기는 것이 마치 정부의 종교 탄압에 믿음으로 순교한다고 착각하고, 수 많은 목회자의 부끄러운 짓이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 정인아 미안해"라는 사건을 보며 목회자라는 사람이 악마와 같이 아이를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을 보며 " 나는 그들과 달라요.." 하고 말한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겐 다 같은 개독교일 뿐이다. 이런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의 삶은커녕 세상의 오염물처럼 사는 크리스천을 보며 할 말을 잃을 때가 많다. 나도 뭐 그리 다를까... 죄를 보고도 묵인하고 침묵하는 것도 다 똑같은 죄인인 것을... 예수님의 수치가 되어 살아가는 죽어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 영혼이 사탄에 팔려 어두움에 왕 노릇 하는 가짜 크리스천의 모습이 세상이 보는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소리 내지 않는 크리스천 .. 침묵하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똑같은 죄인일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수치일 뿐이다.
복음에 부끄럽지 않게 진정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담당하신 예수님 앞에 우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악할 뿐이다. 우리의 악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 예수님에게만 있는 선하심을 가져와 우리의 것으로 삼는 일을 해야 한다. 나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계속 복음을 붙잡아야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유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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