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절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절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절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절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해석:
1. 사도바울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6절)
우선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고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을 하셨을까?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사는 민족이 되게 했을까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한결같이 '너희 죄가 사함 받기 위해서는 대신 피 흘릴 자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내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율법이고 할례이고 제사고 약속이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게서 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난자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자라면 이스라엘이라는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고 높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난자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피를 자랑하고 높이게 된다. 참 이스라엘과 참 이스라엘이 아닌 자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역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제사를 통해서 대신 죽은 분의 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의가 아니라 대신 오신 분의 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의 피안에서 한 백성이다.
2.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는’ 이유는? (7절)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것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약속을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생각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약속이 실현될 가망성이 없자 인간의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 즉 사래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뒤에 이삭을 낳게 되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다'라는 의미로 설명할 수 없다. 이삭에게 담겨 있는 약속은 대신 죽을 자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결국 이삭으로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라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나 대신 죽을 분을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자를 가리킨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나는 산자가 되었다는 고백으로 사는 사람, 이가 바로 약속의 자녀이다.
즉 이삭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삭에게 담겨 있는 약속을 인정하시는 것이지 이삭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삭으로 난자라야 자녀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은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한 자가 곧 자녀라는 것이다.
이삭이 경험한 약속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죽어야 할 자리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이 대신 죽는 것이다. 즉 수양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난 것을 체험한 것, 이것이 약속이다. 따라서 이삭으로부터 난 자녀는 이삭처럼 죽어야 할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났다는 경험이 있는 자이다.
적용:
하나님은 13절에서 말씀한 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을 미리 정하셨다. 그리고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이미 작정하신 것이다. 사랑할만해서 사랑하고 미워할 만해서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미워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랑하고 미워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조건으로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입니까? 그 대답은 오직 부르시는 분이 결정하신 선택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데 있어서 우선권이 없다. 어떤 행위가 있든 어떤 지위에 있든 상관없이 그것들이 부르심의 우선권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들이 인간의 행위를 조건 삼아 부르심의 우선권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철저한 반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택된 자에게서 무엇을 요구하실까? '하나님이 죽음과 삶의 주인이시다'는 것을 증거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이다. 구원이 포기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를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근거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우리 행위를 묻지 않으셨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우리 행위와 관계없이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마쳐질 것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 생각할 뿐이지 자기 행위를 근거 삼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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