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배자

마태복음 16장에서 20장 묵상

차작가 2025. 5. 15. 08:31

나는 이즈음처럼 왜 하나님은 나의 친구를 위한 기도를 외면하실까?라는 생각만으로 가득 찬 적이 없었다.

친구가 사금파리 같은 마음을 글로 쓰며 간절히 도와달라고 강변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잠에서 깨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친구가 그려져 황황한 마음에 억지로 잠을 청하곤 한다.

그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한 번도 기도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에 희망을 가지게 된다.

때로는 나의 기도와 다른 응답이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기도의 방향이 틀렸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기에 그것도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17: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마태복음 17장에선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부르신다.

이 말은 원어로 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이다.

비뚤어졌다는 건 마치 나무가 물속에 들어가면 꺾여 보이는 것과 같다.

실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왜곡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믿음이 많았다면 고칠 수 있었고 그들에게 더한 일도 가능케 한다는 말씀이다.

즉 불가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작고 많고를 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믿음의 양이 아니라 질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17:21 (없음)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 계실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믿음이란 주시는 분도 자라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신데 제자들이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질문을 가지고 다시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 아래에서 제자들이 고군분투하는 시간에

예수님은 변화산 위에서 계셨다는 것에 해답의 첫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

문맥상 17절 초반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변화산에 함께 간 제자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있었고

나머지 제자들은 아버지의 간청에 도움을 주지 못해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한 제자들은 절망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병자를 위해 기도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자신들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이 들었을 수 있다.

그리고 모여 있는 군중들의 시선으로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적고 삐뚤어진 세대라고 질책하신다.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무능력을 질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신뢰의 결핍을 지적하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다"가 아니라 "작다"이기 때문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문자 그대로 17절은 "믿지 않는 신실하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20절에서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7절은 패역하고 완고한 세대 불신앙의 세대를 곧 군중들을 향하신 말씀이고

제자들에게는" 적다"라고 말씀하시며 충분한 믿음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귀신 들린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두 가지 믿음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다.

겨자씨는 지름이 약 1~2mm이고 무게가 1그램에 250개에서 500개 정도이며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작은 씨앗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씨앗이 자라면 보통 1.2m에서 3m 정도 자라고 최대는 4~5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통해 작은 믿음의 시작이 큰 믿음으로 자라남을 강조하셨다.

작은 믿음이라도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산을 옮길 만큼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주체도 예수님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향해 꾸짖으시는 건 영적 전쟁을 선포하신 것이다.

21절은 일부 고대 사본들 중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러나 흔히 알려진 내용은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되어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알았기에 제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적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유이다.

믿음은 질적인 부분에서" 적다" "크다"라고 표현되기에 그들에게 믿음의 성장을 요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 쫓는 기도를 하실 때 영적 전쟁을 선포하셨다.

기도와 금식은 자기 의지를 죽이고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겨자씨만 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만든다.

나는 변화산과 산 아래서를 대비해 보여주시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느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신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기도는 행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도 하는 것도 아님을....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어 주셨기에 산 아래에서 실패했을지라도 자라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고 당황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예수님께 와서 실패했으니 도와 달라고 말하면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믿음이 적다고 느꼈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길 노력하면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믿음은 자란다.

이것은 믿음을 주신 주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자라게도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를 드려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니라 그들이 묻길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는 실패했어요. 그런데 왜 실패했을까요?"라는 질문을 기다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듯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 사건 이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함께 하셨고 끝까지 동행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변화산에 따라 가지 못해도 괜찮다.

믿음이 작아도 괜찮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내려와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을 때...

산 아래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 수도 있어.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함께 하는 것 같고 나는 혼자인 것 같거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느꼈던 것처럼 말이야.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실력 없는 제자들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야.

마치 믿음 없는 무능력한 제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을 거야.

그럴 때 스스로 자책하게 되지...

그런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다가오셨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비웃는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셨지.

제자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구원자 이심을 증명해 주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자들에 질문한 것처럼 하면 되는 거야.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넌 왜 이 정도도 못하니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지.

그리고 예수님은 정확한 답을 주셨지.

그래서 우리는 함께 믿음이 자라길 노력해야 해.

내 말은 우린 아직 자라가고 있는 중이라는 거야.

네가 자라 가기 위해선 주님 안에 머물러 있기만 하면 돼.

마치 제자들이 도망가지 않고 산 아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