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묵상

손바닥 묵상 1 - 룻기 묵상

차작가 2023. 9. 18. 09:12

룻기 하면 나는 병원이 먼저 떠오른다.

작년 1월 말에 응급실에 가서 읽었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때 코로나로 병실이 꽉 차서 응급실에 있다가 일반 병실로 옮겨서 이 말씀을 "매일의 말씀 묵상"편에 업데이트한 기억이 난다.

그 이후에도 6번 정도 뇌출혈이 일어나서 병원을 집처럼 들락거리며 일 년을 보냈기에 참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그날 밤 컴컴한 병실에서 울며 기도하던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힘들긴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감사드린다 나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롯기서는 사사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이지만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과부 3명이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주위에 따뜻한 이웃의 배려 때문에

그들이 살만한 세상으로 살아가는 스토리이라서인지 오히려 따뜻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보아스와 룻을 통해 앨리멜렉의 자손을 이어 가게 하셔서 이방 여인을 통해 다윗의 계보를 잇게 하시는 놀라운 경륜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여인을 뒤로하고 이방 여인을 통해 혈육의 계보가 아닌 믿음의 계보를 택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드라마와 같은 오늘의 말씀 중에서 유독"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2장 13절 말씀이 종일 생각이 났다.

우리 교회가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부흥회가 있어서 말씀을 묵상하고 바로 기록할 수 없어서 3일 동안 같은 말씀만 묵상하고

비로소 오늘에서야 말씀을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니 이 짧은 말씀을 3일 동안 묵상한 셈이다.

이 말을 보아스가 하게 된 계기는 11절과 12절에 나온다.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은 이스라엘이 혐오하던 모압지방의 이방 여인이었다.

나오미 가족이 먹고살기 위해 피난처럼 가서 살았던 지역에서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은 그 땅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두 아들마저 죽자 두 며느리가 나오미에게 남겨진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중에 큰아들의 아내였던 룻은 그 유명한 고백인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고백을 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사기 시대에는 모두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끝을 맺는데

이 이방 여인 룻의 고백은 참 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찾는 자는 반드시 구원해 주심을 룻을 통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심을 볼 수 있다.

롯의 섬김은 베들레헴 지역에 소문이 자자하게 만들었다.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를 선대해서 끝까지 섬기며 자신의 모국도 버리고 공경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맥상 나이가 좀 든 보아스는 이점을 높이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룻을 위로하고 그녀를 도와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룻의 형편을 돌아봐서 이삭을 자신의 땅에서 얼마든지 줍게 하고 물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이 행패를 부리지 않도록 모든 것을 세심하게 봐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말도 한다.

그 시대는 고와와 과부는 사회적으로도 최하층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욱이 룻은 이방이 여인이었다.

보아스의 이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그녀를 기쁘게 한 것이다.

비단 물질이나 육체적인 고난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도 돌봄의 대상이 된다.

내가 속해있는 지역이나 출석하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물질적으로 돕는 것뿐만 아니라 같이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성도가 무거운 짐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함께 져 주는 섬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 우리 목장이 규모도 커지기도 해서 분리하는 결정을 내렸었다.

보통 목장이 성장하면 분리를 하는데 10년 동안 한 번도 분리한 적이 없었기에 목자도 번아웃이 온 것이다.

목자님도 최근에 힘든 일을 겪으면서 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못했을 일을 묵묵히 해 온 목자님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원래 교회 일은 아무리 큰 교회도 소수가 다 감당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마지막 모임을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섬김이라든지.. 봉사를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누군가가 무거움 짐을 들고 간다면 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지 않았을까?

섬기는 게 자기의 의가 되어서는 안지만 자발적으로 해야만 된다고 한 사람에게만 무거운 것을 너무 맡기진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한번은 우리 집에서 목장 모임 해요!라는 말도 힘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섬김... 봉사.. 뭐.. 이런 거창한 단어를 떠나서 한 번쯤을 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쩜... 봉사는 자원해서 해야지..라는 말속엔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시간을 그곳에 사용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우리 가족 모임이 더 소중해요 ...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그럴듯하게 포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척 은혜로운 말로 포장해서 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뭐 다... 도긴개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신도 일 때는 너무 나만 일시키는 것 같아서 불평이 많았었다.

왜 우리 가정에게만 헌신을 강요하나 하는 불평이 있었다.

그럴 때 목사님은 할 사람이 없어요.. 하신 게 기억이 난다.

목회를 해 보니 정말 할 사람이 없다. 부탁하면 "강요하면 시험 들어요!"라는 대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자원은 빼고 인간의 도리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믿음의 문제이고 아직 신앙이 어려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논리로 그것이 신앙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문제이다.

보아스가 룻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말이 힘을 얻은 것처럼...

말이라도 솔직하게 " 하기 싫어서요 못 섬겼어요. 아니면 내 시간이 더 소중해요!" 하던지 참 씁쓸했다.

목자가 양반이라 좋게 이야기하며 마무리했지만 포장을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합류한지 2달밖에 안되어서 어떤 마음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고 끼어들고 싶지 않아 넘겼지만

나누어진 게 잘 된 거라는 마음이 들었다.

최소한 목자의 어깨의 짐은 줄어들 수 있었고 안식년 기간을 통해 회복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의 짐을 가볍게 해 주는 것이 그녀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음을 나도 그들도 깨달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