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과의 대화 - 요한복음 8장 3-11

차작가 2023. 10. 25. 11:22
출처: 구글이미지

1절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절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절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절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절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절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절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오다

1) 예수님이 성전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끌고 온 이유는 6절처럼 troublemaker인 예수님을 이 여자와 율법을 이용해서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였다.

2) 5절처럼 질문을 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만일 예수님이 돌로 그녀를 치지 말라 하면 왜 모세의 율법(레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 22:22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어기고 지키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예수님이 그녀를 돌로 치라 하면 일반인들의 사형집행을 법적으로 못하게 하는 로마법을 어기는 자로 몰아가려고.. ( 로마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는 법이 없으니 만큼,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법대로 하라고 명하신다면 로마법에 걸리게 되고, 모세의 법대로 하지 말라고 하신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에 걸리게 될 것이었다.) 또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그간의 가르침을 스스로 안 지킨 셈이 된다. 즉 말만 앞서는 위선적 랍비가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7절과 같이 답변하신다.

1) 7절 예수님은 상상하지 못한 답변을 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2) 인간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른 대답으로 오히려 유대인들을 궁지로 빠트리셨다. 유대인들의 모략을 잘 벗어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볼 수 있다.

3. 9절에 이 말씀에 대한 반응이 나온다.

1)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다 떠난다. (어른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더 많은 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더 많이 느낀다는 의미일 것이다. 흥미로운 건, 돌로 치지 않으면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여인을 고소하던 이들이 오히려 자기들을 고소한 셈이 되었다. )

2) 다 떠나고 간음한 여인 혼자만 남는다. 율법으로 정죄하려던 자가 다 사라졌으니 그 정죄함 즉, 돌로 쳐죽임 당함에서 여인은 풀린 셈이다.

3) 그 여인은 당시 상황으로선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주님 앞에 아마도 엎드린 모습으로 끝까지 남아 있는 형국이 되었다. 스스로 부끄럽고 겸비해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용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은 상태였을 것이다.

4. 그 여인에게 10절과 같이 말씀하신다.

1) ‘여자 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이 말은 경어이다. 예수님이 어머님께 여자여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죄인을 향한 마음과 태도가 이런 것이다.

2)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죄과를 가볍게 보시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제멋대로 재판장이 되어 남을 정죄하는 인간들의 월권 행동을 옳지 않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신약 시대를 당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에 영적(靈的)으로 사죄함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암시한다.

3) 11절에서처럼 여인이 대답한다. ‘주여 없나이다’

이때의 심정은 어떨까? 죽을 줄 만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살아있는 심정을 생각해 보자!

5. 그러나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으셨다.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신 사명이 우리를 정죄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를 회개케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 보여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간음한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율법과 대비한 은혜를 드러낸 것이다. 율법은 정죄하고 죄를 기억나게 하며 결국은 죽인다. 이 여인을 향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죄를 덮어 주고 생명을 살린다.

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5.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1)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neither do I condemn you.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 선포의 말이다. 죄가 없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율법처럼 우리의 죄를 들추면서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선포에 대해 우리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너 자신을 위해서 대신 그리스도가 죗값을 치렀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게 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칭의(Justification)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그리고 확정적으로 죽어 죄가 없다고 여겨지지만, 죄의 정욕의 잔재가 우리 몸 안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감기 들었을 때 감기약이나 주사를 맞으면 열이 식고 감기의 위세가 꺾이지만 감기의 잔재가 완전히 제거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우리 몸은 여전히 감기와 싸워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 용서받은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2)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은 남아 있는 죄의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죄 용서를 받았지만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의 세력과 싸우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혼자 싸웠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을 때 이미 성령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제는 성령의 힘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어두움을 멀리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빛 가운데 행하면 죄와의 싸움에서 늘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성도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받은 성도는 더 이상 도덕적 종교적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생각이 나 말로나 행동으로 실제적인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성화라고 한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어도 그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을 줄이고 없애는 싸움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원하시는 것은 이제 죄 용서함을 받았으니 죄악된 생활을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용서를 확신했다면 그런 생활에서 떠나 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요약:

바리새인인들 과 서기관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이 여자와 함께 율법을 이용해서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이용해 여자를 돌로 치라 해서 쳐야 되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여인으로 덫을 놓아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해서인지 알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떠나간다.

모두 떠나고 난 다음 여인 혼자만 남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죄를 회개케 하시고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보여 주셨다.

결론: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신약성경 전체 주제를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자에게 이제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간음한 여자였고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죄를 범하는 삶을 살지 말고 거룩한 행실의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은 가서 다시는 음행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의 죄가 무엇으로 용서받았는가를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여인에게 다시는 간음하지 말 것을 원하셨다면 '가서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간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가서 또 간음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간음이란 행동은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자연히 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서 죄라고 하는 것은 간음, 살인, 도둑질과 같은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라기보다 죄는 우리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를 잊고 있고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간음이 나오게 되고 살인 도둑질 같은 이웃을 해치는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간음하지 말아야지' '내가 남은 비판하지 말아야지'라는 의지를 스스로 갖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고 내가 예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자연히 그 마음에서는 간음이라는 것, 남을 비판하는 것 등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어있다. 은혜가 그러한 욕구를 이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율법은 남을 정죄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정죄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바로 정죄 받은 이 경험이 있는 자이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비판할 자기 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이것이 죄를 범치 않는 것이다. 우린 예수님으로부터 정죄함을 받지 않고 용서를 받았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