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두 제자의 어머니와의 대화 - 마태복음 20장 20-28

차작가 2023. 10. 25. 11:27
출처: 구글이미지

 

20절 그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도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절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람이 권력을 좋아하는 이유>

우리 세대엔 어릴 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답이 대통령이었다. 왜냐면 가장 많은 권력을 주고 대통령 명령에 다 순종하니까 너무 멋져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권력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강하다. 어떻게 하든 남을 지배하려 하고 부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빨리 승진해서 아랫사람을 부려 보길 원한다.

<인간의 타락된 모습>

1)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

2) 힘을 행사하려는 욕구

3) 궁극적으로는 그 힘을 자기 맘대로 쓰고 남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 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높아지려는 성도들에게 경종을 주는 말씀이다.

1. 20절: 오늘 본문은 20절에 ‘그때’로 시작하고 있다.

‘그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세 번째 말씀하실 때이다.

못 박히실 때 누가 왔었나? ‘세베대의 아들(요한)의 어머니와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왔었다.

(요 19:25)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막 15:40에는 살로메로 기록: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2. 21절: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1) 21절처럼 말하게 된 동기는 마 19:28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때문일 수 있다. 특히 자기 아들들이 예수님 바로 옆 좌, 우에 앉기를 원했다.

2) 왜 요한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을까? 예수님 다음으로 권세 있는 자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3) 그럼 왜 사람들은 더 많은 권세를 누리려고 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가?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높아지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의 어머니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22절처럼 답변하신다.

3. 22절: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그 고통을 당할 수 있느냐이다. 나는 그 진노의 잔을 완전히 마실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당할 고통을 너도 당할 수 있겠느냐이다.

이 두 사람의 답변은 할 수 있니 다였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예수님의 말 뜻을 모르고 한말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의 답변에 예수님은 23절과 같이 말씀하신다.

4. 1) 23절: 그들이 마실 것이라는 것은 야고보는 순교(행 12:1-2, 헤롯 아 그립 바 1세에 의해) 하고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고난에 근거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2) 잔을 마셔야 한다. 잔은 때로는 야고보가 겪은 것처럼 목숨까지 잃는 최악의 것도 되지만 요한처럼 유배되고 나중에 에베소에서 100살까지 살고 자연스럽게 죽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 잔을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요한이 마신 잔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평생을 살면서 예수님 때문에 희생하고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잔을 마신다는 것은 단 한 번만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서 그 잔을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로고스 주석) 평생에 잔을 마신다는 것은 평생 예수님의 말씀만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3절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

3) 요한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대화를 듣던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이 24절에 나온다. 열 제자들이 분낸 것은 그들 역시 자리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7절)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자리에 대해 물어보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서로 격분한 제자들을 친히 불러 모아서 하시는 얘기하신다.

5. 25절:이방인들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주인 행세하는 것들이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너희들은 달라야 한다. 세속적인 리더는 명령으로 이끈다.

6. 26절, 27절에서 예수님의 해법은

1) 26절에선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가치관을 바꾸는 말이다. 성도들은 세상과 같이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역행하는 사람들이다.

2) 27 절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해법이다.

7. 28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다.

1) 성육신하신 이유는 섬김(Serving) 과 주는 것(Giving).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오실 때는 말구유에 오시고 가실 때는 십자가에서 가셨다. 상식적으로 볼 때는 너무 비참한 인생을 사신 것이다. 우리 중에 말구유에 태어난 사람이 없고 죽을 때 남들로부터 조롱당하고 처절하게 피 흘리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왜냐면 바로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였다.

이 말처럼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는 구절이 없다.

2) 예수님은 섬기려고 오셨다. 우리의 가치관으론 이해가 안 된다. 왕으로 오셨지만 다스리시지 않으셨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

3)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예수님은 어떻게 이 말을 보이시면서 실천하셨는가?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3절과 4절은 모순된다. 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고, 전능자이며, 원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영원부터 존재했으며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계셨다. 그런데 이런 분이 4절에 보면 모순되는 장면이 나온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은 종의 자세를 취해서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씻어 주고,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 줄 준비를 하고 계셨던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중 누구도 감히 허리를 굽혀 할 수 없었던 그토록 품위를 떨어뜨리는 지저분한 일을 몸소 하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겸손하고 순전한 종으로서의 모습인가? 오히려 그분은 섬김을 받을 권한이 있었는데 말이다.

‘위대한 권능’과 ‘비천한 종의 도’라는 두 개념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는 이 두 가지 특성이 확실히 공존한다.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종’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본질상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선포한다.

빌립보서 2:6-8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랑은 본질상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은 이렇게 선포한다.

빌립보서 2:6-8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8.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은 다음과 같이 풀어쓰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셨으나 자신이 그 지위를 누려야만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때가왔을 때,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버리고 종의 지위를 택했으며, 마침내 사람으로 오셨다!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의 삶을 사셨다. 그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겸손이었다. 그는 특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순종하는 삶을 사셨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비우고 죽음을 택함으로써 순종했다. 그것도 십자가 처형이라는 가장 극악무도한 죽음을 말이다.”

왜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왜 예수님을 경배하세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기꺼이 고난을 받는 종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런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가 바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종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신 예수님께 감사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삶이야말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종 믿음의 사건’이라는 책의 저자인 리 스트로벨이라는 칼럼리스트가 예전에 테레사 수녀와 록 스타 마돈나의 극히 다른 인생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두 사람의 차이점을 발견했는데 그 차이점은 마돈나는 행복한 사람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에너지를 쾌락을 추구하는데 바친 반면에 테레사 수녀는 모든 인생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바치면서 더할 나위 없이 그 인생을 만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삶에 대한 만족감을 얻는 이유를 봤더니 2가지가 있더라는 것이다. 첫째자신들을 위해서 종으로 섬기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그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서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서 만족감을 흘러넘치게 부어 준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계속 경험하니깐 봉사하고 섬기면 섬길수록 더 활력이 넘치고 큰 기쁨과 만족을 주기 때문에 이제는 봉사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된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만족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을 쓴 존 뉴턴이 ‘종의 도’에 관해 이런 말을 했다. 그가 쓴 글에 의하면, 하늘에 두 천사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받았다. 한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를 통치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천사는 가장 더러운 마을의 거리 청소를 하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고 난 후에 천사의 얼굴을 보니깐 모두 표정이 같더라는 것이다. 그 비밀은 바로 어떤 일을 맡은 것이 그 천사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체가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일까?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왜냐면 이 길이야말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요약: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며 부탁을 한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여인은 주님의 나라가 세상의 권세 있는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에서 각각의 아들들이 한자리를 차지하며 권세를 누리는 그런 사람이 되길 원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런 질문에 자신만의 생각으로 차 있던 여인은 "네"라고 대답을 한다.

이 대화를 듣던 제자들은 분을 낸다. 그들 역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격분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불러 모아서 말씀하신다. 이방인들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주인 행세하는 것들이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너희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었다. 바로 예수님의 나라는 권력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결론:

리처드 포스터는 그의 저서인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 훈련’에서 ‘섬김’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섬김에는 독선적인 섬김(저는 거짓 섬김이라 하고 싶다)과 참다운 섬김이 있다. 독선적인 섬김은 거창한 봉사일 때 더 즐겨 뛰고 선행 게시판에 기록되기를 원한다. 반면 참된 섬김은 작은 섬김, 큰 섬김의 구분을 두지 않고 꼭 필요한 섬김에 관심을 둔다.

또한 독선적인 섬김은 외적인 섬김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을 보고 인정해 준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반면 참된 섬김은 숨겨진 채로 만족한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관심이 없고 그 일이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실 만한 일이면 만족한다. 독선적인 섬김은 결과에 큰 관심을 갖는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만큼 보답을 하는지 않는지를 기대하며 기다린다. 그렇지 않으면 기분 나빠한다. 반면에 참된 섬김은 결과를 계산하는 욕망이 없고 다만 섬김 자체를 기뻐한다. 그리고 독선적인 섬김은 기분에 따라 변덕스럽게 바뀌고 일시적이지만 참된 섬김은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일시적이지 않고 하나의 생활 양식이며 뿌리 깊은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에서 힘을 얻는다.

진정한 영적인 권위는 지위나 신분에서 나오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기시기 위해 수건을 든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에서 영적 권위가 나옴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려는 마음이 예수님이 오늘 말씀으로 보여주신 섬김의 삶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