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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 여호수아 1장 1-9절

차작가 2023. 11. 15. 11:35

서론:

출애굽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오던 모세라는 인물이 죽고, 대신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니 이스라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모세 대신 여호수아를 내세우신 것을 여호수아가 모세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모세가 잘못했기 때문의 모세를 죽이고 대신 비록 모세의 시종이지만 모세보다 더 나은 여호수아를 세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처사이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했어야 할 남은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특별히 다른 사명이 부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를 모세와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된다.

만약 하나님의 일을 인간들의 힘을 빌려서 성취해 가신다면 분명 하나님은 좀 더 능력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힘을 빌려서 일을 하지 않으신다. 인간이란 존재는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담아서 세상에 부어 놓는 그릇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릇이 능력이 있는 그릇, 능력이 없는 그릇으로 구분될 수는 없다. 그릇은 단지 그릇일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종'이라고 한다. 종은 주인의 뜻을 전달하는 자이지 자신의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는 존재가 아니다.

본론:

그런데 1,2절에서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라는 말씀을 보면 종의 역할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1절에서 모세를 가리켜 말하기를 '여호와의 종'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세 대신 세우는 여호수아를 가리켜 '모세의 시종'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내에서 힘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시종을 세웠다. 시종이란 늘 주인을 따라다니며 수종을 드는 종을 말한다. 시종은 주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에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갈 자로 세웠다. 모세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일을 이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5절에서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모세를 다루시고 모세를 사용하셨던 것처럼 너를 다루고 사용하시겠다는 의도의 말씀이다.

모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모세를 인도하셨다.

여호와의 종이란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다. 여호와의 종이라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과 힘을 부여받지 않는다. 여호수아 역시 특별한 권한과 힘과 축복을 부여받은 것이 없었다. 다만 모세가 해야 할 일을 계속 이어가는 자로 세움 받은 것뿐이다.

성도에겐 '나'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란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 세상에 그대로 붓기 위해서 남겨진 사람이다. 그런데 성도에게 '나'가 존재하면 결국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개인의 사정과 입장을 고려하면서 수립되고 실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성도 된 우리들의 환경이 뒤바뀔 수 있고, 뜻하지 않았던 고통과 어려움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데 내 속에 '나'가 존재하면 그럴 때마다 결국 나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불평과 원망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방해받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인간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결국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서 실패의 결과는 죽음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실패를 극복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을까?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간은 실패한 존재다. 약속의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만 순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 일을 여호수아가 대신해야 했다. 그래서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가 이해한 여호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에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는 자기 계획이란 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서 하시고자 했던 남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 남은 일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여호수아였다. 이것을 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 계획이란 것이 있고, 그것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적이고 원수이다. 하나님은 그것과 싸우겠다는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 그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천국을 얻은 자, 약속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는 필연코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이 싸움을 통해서 십자가의 흔적이 드러난다.

가나안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다. 승리한 자의 전쟁이다.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은 우리가 이긴 자이신 그리스도안에 머물러 사는가를 확인하는 싸움이다.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싸움이다. 천국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얻은 자로 싸우는 것이다.

흔히 교인들이 성도의 신앙생활을 승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성도는 승리를 향해서 올라가는 존재가 아니라 승리한 자로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싸움은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싸움이어야 한다.

3-4절을 보면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시겠다고 하신다. 우린 이 말씀을 '이스라엘이 아무 땅이라도 밟기만 하면 다 주신다'라는 약속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6절에서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6절에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땅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조상에게 약속한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발바닥으로 밟는 것을 다 주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오직 약속의 땅만 사모하면서 그 땅만 밟으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기 욕심껏 땅을 밟아서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마음대로 밟아라는 뜻이다. 이것이 약속 안에 사는 성도이며 이미 승리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다 주신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주신다고 약속한 것만 주시는 분이시다. 약속하신 것을 주시겠다는 것이지,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다.

7-8절에 보면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율법대로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형통하게 하신다는 뜻의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통이란 우리의 일이 형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형통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통을 자기 일의 형통으로 이해해 버린다. 하나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형통해져야 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가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다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서 전옥의 신임을 얻어서 옥의 모든 일을 처리하게 된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요셉의 형통은 요셉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잘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요셉은 애굽에 팔리고 옥에 갇히는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형통이란 내 일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 것이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의 자세이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일을 생각해 버린다면, 결국 자기를 위한 싸움이 되어버린다.

결론: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내 일이 잘 되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이 과연 종의 자세일까?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은 감투도 아니고 권세를 받은 신분도 아니다. 단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나타내 보일 존재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종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적으로 삼고 싸우게 된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며 살아가야 할까? 골 1:24절에 보면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살아갈 자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것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셔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도가 자기를 위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흔적이 방해를 받게 된다. 자기 손해와 희생을 싫어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우리 육체에 채워질 수 없다. 그래서 7절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그 사랑만 앞세우며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시간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봤으면 한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취소되지 않는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자. 그럴 때 그 사랑이 우리를 여호와의 종으로 살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신을 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자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내가 나의 주인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흔적을 담아내는 생애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