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 요한복음 11장 1-15절

차작가 2023. 11. 15. 11:37

도입:

1. 기도에 대한 무응답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 성경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A. 죄를 품고 있을 때

아간의 죄: 여리고성을 친 후에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한 것 때문에 작은 성 아이성 공격에 실패하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 7:11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B. 욕심을 가지고 구할 때

약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세상적 욕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응답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 기도가 응답되면 절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C.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 본문 말씀

 

본론:

1. 배경

A. 요 10장 31-39 => 유대 사람들이 증오(31절) 하고 신성모독 죄(33)로 돌로 치려고 함(39절)

B. 이러한 위협을 피해서 현재 요단강 동편 지역인 베레아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음.

1) 탕자의 비유, 청지기 비유 등으로 가르침

2) 이 지역에서 베다니까지는 하룻길 정도

C. 3년간 공생애 사역이 끝나는 시점

1)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다시 유대 지역으로 가시려는 시점

2) 나사로의 기적은 사실상 예수님 기적의 Climax를 이루는 것임.

 

2.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을 전해 들음

A. 3절에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다고 전해 들음.

1) 마르다, 마리아 자매 집에 자주 유하실 정도로 사랑하시고 가까웠다.

B. 예수님의 반응이 놀랍다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병이 죄 때문에 아닌 경우이다.

요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사도바울: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사로의 병은 오래 지속된 지병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병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자주 들르셨기 때문에 지병을 앓고 있었다면 고쳐 주셨을 것이다. 이 병은 (정확한 병명은 나와있진 않지만) 4절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C. 예수님이 취한 신 행동

5절, 6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 바로 달려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셔서 더 그렇게 했다고 하셨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사랑한다면 더 빨리 서둘러 가야지 오히려 지체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제자들 중에 “예수님. 빨리 안가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15절에서처럼 오히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나사로가 죽을 때 거기 있지 아니한 것과 죽도록 내버려 둔 것을 오히려 기뻐하셨다. 그 이유가 바로 너희-제자들(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을 위해서였다.

3. 예수님이 베레아 지역에 이틀을 머무르신 이유 첫 번째 이유는 나사로의 가족들과 제자들의 유익(믿음)을 위해서이다.

A. 얼마나 가서 살리고 싶었겠나? 아무도 반겨 주는 사람 없는데 이 가정은 예수님을 반겨 주었다.

굳이 거기에 가시지 않더라도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직접 가시지 않고 고치신 것처럼)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말로서만 명령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이틀을 머무르셨고 이것을 예수님은 기뻐하셨다.

바로 마리아의 가족과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였다. 그럼, 그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떠했나?

B. 마리아의 믿음의 현주소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렇게 말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과 그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예수님을 기다렸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나사로가 죽은 후에도 바로 예수님이 오시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고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이 오신 것에 대해 조금은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서운한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낱같은 소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22절처럼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이 고백은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은 어떤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절망 속에서도 주님 때문에 소망을 붙잡고 믿음의 고백을 드릴 때 전능하신 주님이 일하신다.

이런 마르다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응답해 주셨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는 자신 있다는 듯이 24절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고백한다."죽은 자는 언젠가 먼 미래에 다시 살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기적을 베푸실 수는 있어도 나흘이 지난 나사로 오라버니를 지금은 살릴 수 없습니다." 마르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기는 했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현실 앞에서는 믿음의 부족을 드러났다.

지금 마르다는 자신의 반쪽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미래의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유대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지금까지 행해온 관념이나 세상적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것이 반쪽 믿음인 것이다.

이런 반쪽 믿음을 갖고 있는 마르다에게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셨다. 부활은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지금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있는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경험할 수 있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It has come! 경험과 배운 지식만으로 이뤄진 믿음의 한계를 드러낸 마르다, 마리아(32절에서 마르다와 똑같은 고백을 함)에게 이런 선포는 아마도 충격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이런 믿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레아 지역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본질적인 믿음의 한계를 드러나게 하시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참된 예수를 알게 됨으로 믿음이 더 성숙하고 견고하게 하셨다. 성장기의 자녀들이 겪는 성장통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당장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 주길 바랐다. 그러나 자신들의 뜻대로 예수님은 당장 오시지 않았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하나님의 때는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사야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은 가장 알맞은 때와 시기를 알고 계신다.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따져선 안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은 다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병든 나사로를 고쳐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혹은 상상할 수 없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 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느끼실 때 어떤 마음이 들까? 하나님께서 내게 닥친 시련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더 알리시기를 원하시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더 크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면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그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마르다처럼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이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면 반쪽 믿음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완전한 믿음인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계획대로 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러실 만한 분명한 이유를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나사로가 죽은 것에 예수님이 기뻐하신 이유는 제자들과 나사로 가족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였다.

 

4. 예수님이 베레아 지역에 이틀을 머무르신 이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 신 자이시며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A. 나사로가 죽은 뒤 나흘이 된 경위

1.베레아 지역에서 베다니까지는 하룻길(건강한 남자가 하루 평균 50km 정도 걷는다) 이다.

2.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메신저가 올 때 하루 소비했다.

3. 예수님이 베레아에 머무신 날이 이틀이다.

4. 베다니로 가실 때 하루, 총 나흘이다.

메신저가 예수님께 마르다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었다는 결과이다.

 

B. 고의로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죽은 뒤 3일 동안 영혼이 떠돌아다니다가 3일이 지나면 그 영혼이 완전히 떠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혼이 완전히 떠난 상태를 원하셨다.

39절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죽은 지 3일이 지나면 부패가 심해져서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 시키기 위해서였다.

 

C.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심

43절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패가 심한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다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Lordship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12:11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 이러라: 예수님이 창조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부패하여 썩어져서 없어졌다 하더라도 새 생명을 주시고 다시 살릴 수가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깨어지고 조각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너무 늦었어!라고 한탄하기 전에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예수님께 우리의 깨어지고 조각난 삶을 의뢰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겐 있다.

 

결론:

1.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나사로를 죽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택하신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를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2. 사랑하는 나사로를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에 대해 예수님이 기뻐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고귀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시기까지 버려두신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침묵하신 하나님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침묵하심을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에 응답이 없고 침묵하시는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확신하고 기도하길 바라본다. 하나님의 침묵이 지금은 알 수 없으나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된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더 예수님께 나가고 주님만을 붙드시길 바란다. 그럴 때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