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신앙 생활에서 예배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가를 생각해 보자
본론:
A. 잘못된 해석
1. 2절: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나님은 농부 보다 목축업자를 더 좋아하시는 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말자.
2. 드린 제물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 인가?
3절: ‘가인은 땅의 소산(열매, 곡물-some of the fruits of the soil)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절: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피의 제사가 아닌 곡물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주장은 틀린 해석이다.
레 2장에 소제(grain offering)에 관한 규례가 있다.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지니라 2: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 돼’
제물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받고 안 받으신 게 아니었다.
B.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신 이유는 => 7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으시자 가인은 심히 분해했고 그의 안색마저 변했다. 그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인의 제물을 열납 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
1. 7절을 보시면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가 있다. 그런데 70인 역 (LXX)에 보면 그 ’선을 행하다’ ‘야타브’라는 동사가 ‘예물을 올바로 바치다, 제물을 올바로 바치다, 올바른 제사를 올리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그래서 70인 역은 창세기 4장 7절을 ‘네가 제물을 올바로 바쳤다면(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올바로 제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가인이 ‘하나님 왜 내 제사는 기뻐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 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제물을 올바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야(제사를 올바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을 하셨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선을 행하는 일과 아름답고 유익한 일은 올바로 제물을 바치는 일, 즉 올바른 예배의 삶을 사는 것과 정확하게 동의어로 인식이 되고 있었다. 7절의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는 말 그대로 ’네가 선을 행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행하면’이라는 뜻과 ‘네가 올바른 제물을 드리면, 즉 올바로 예배를 하면’이라는 말을 동시에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어구이다. 즉 이 어구는 ‘제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배’의 이야기이다.
정리를 하면, 하나님께서 ‘왜 내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가인에게
‘네가 올바로 드린 제물을 통해서 올바른 예배를 하면, 다시 말해 네가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면 왜 내가 받지 너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겠느냐?’라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그럼, 올바로 드린 제물을 통한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가?
C. 올바른 예배란? 히 11:4 (성경으로 해석하자)
히 11:4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히브리서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더 나은 제사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제물의 종류의 차이가 아니면, 그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다시 창세기 본문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이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린 것으로 되어 있다. 레 3:16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레 27: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본 것처럼 첫 새끼와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즉 가인은 단지 자기 소산을 제물로 드린 것이지만 아벨은 자기 소산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드린 것이다. 즉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제물을 통해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거 한다는 것은 아벨이 바친 양을 증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통해 나타난 아벨의 구별 의식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자신의 소산을 바치는 가인의 제물은 단지 바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즉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며 받으실 것이라는 수준이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중점을 둔 것이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바치는 행위에 중점을 두면서 제물에 신경을 쓰는 것, 다시 말해서 많이 바치고 정성스럽게 바치고 좋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가인의 수준이다.
하나님은 예물이 마음에 들어서 아벨의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달랐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인은 바치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수준이라면, 아벨은 자신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 차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기뻐하셨고 가인의 제물은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 차이가 바로 올바로 드린 예물을 통한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십일조 헌금에 대한 아벨과 같은 관점은 ‘하나님이 주신 것 일부를 다시 하나님께 구별하여 돌려 드립니다’이고 반면에 가인의 관점은 ‘십일조를 드렸으니 이젠 됐죠? 저 하나님의 돈 떼 먹지 않았습니다.'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자세로 드렸다면 하나님은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주일 예배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벨과 같은 생각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 '모든 날이 주님께서 주신 날이므로 잘 누리고 잘 살았으니 이제 한날을 주님을 생각하며 구별하여 내 모든 걸 그만두고 오직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오늘 이 주일을 오직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벨이 드린 믿음으로 드린 예배이다.
반면에 가인과 같은 생각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구별하지 않는 것이 가인의 특징인 것 처럼 주일을 별로 평일과 다르게 구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평일에 그렇게 감사하지도 못하다가 그저 때가 되었으니 주일도 평일과 같이 그대로 기대도 없이 나오는 모습 아닐까? 주일예배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할 것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과 같은 생각이 아닌지?
D. 4, 5절의 ‘받으셨다’라는 동사의 형태가 주는 의미
히브리어로 ‘sha-ah’ (gaze-눈여겨 보다, regard with favor(반기다): approve or like-좋아하다, ) 아벨의 제물을 좋게 여기셨다.
sha-ah라는 동사가 4절과 5절에서 다른 형태로 쓰였다.
4절: imperfect(미 완료 형태)로 쓰였다. 미완료 형태란 과거 진행형이면서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될 것을 암시하는 동사 형태. 즉, 아벨의 제사를 좋아 하신 것은 과거에도 좋아하셨고 앞으로 미래에도 좋아 하실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5절에 쓰인 sha-ah는 과거형으로 쓰였다. 즉, 가인의 제사는 과거에도 지속적으로 좋아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한 번으로 좋아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가인이 드린 제물에 거의 ignore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드릴 제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동사의 차이점을 보고는 참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드렸던 예배가 아벨처럼 과거에도 하나님께 사랑받고 또 앞으로도 사랑받을 것인가? 아니면 가인처럼 과거에도 하나님이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대하지 않고 계시지는 않는지?
하나님께 드린다고 드린 예배와 헌금이 또 헌신이 아벨에게 하신 sha-ah인 지 아니면 가인에게 하신 sha-ah 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7절을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가 있다. 그 어구에 쓰인 ‘선을 행하다’ ‘테티브’라는 히브리어는 ‘유익하다, 아름답다, 옳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야타브’의 미 완료형이다. 그런데 이 ‘야타브‘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한 번도 완료형으로 쓰인 곳이 없다.
그 말은 선을 행하는 상태, 옳은 상태, 유익한 상태는 한 순간에 완성된다거나 한 순간 있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중단 없이 계속 지속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론:
예배에 실패하면 결국 어떻게 되나? 7절의 경고처럼 죄를 다스리지 못해서 8절처럼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게 된다.
앞으로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헌신들이 하나님께 모두 열납되기를 바란다. 아벨처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이 앞으로도 기대하실 만한 sha-ah가 있길 바란다. 예배에 성공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서 궁극적으로 하늘의 참된 축복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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