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 사도행전 1장 12-14절

차작가 2023. 11. 30. 12:17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절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톨로 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절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본문 해석:

1.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첫 번째 삶은 순종하는 삶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이제 때가 되어 승천 하시는 걸 본 제자들은 지금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11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당시 예루살렘은 제자들에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곳이고 지금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런 장소였다. 비록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로 가득 찼고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가지고 부활했다고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면서 제자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곳이 예루살렘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었다.

만약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성령의 세례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체험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순종에서 시작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이런 순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까 나도 죽어도 주님처럼 살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있던 예루살렘으로 과감히 돌아 갈 수 있었다. 그만큼 부활의 확신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도 죽어도 살리라는 부활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즉,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아들을 드릴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고 또한 확신에서 나온다. 그리고 순종의 예를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한다. 예수님 만큼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신 분은 없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자기 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 정의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앞서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의 생각을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기 부인이란 사람의 뜻을 이루는 것 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이다.

자기부인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난하게 되어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려고 한다. 자기 부인이 없는 사람의 기도와 자기 부인을 날마다 하는 사람의 기도의 차이점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자신의 기도 제목에 맞추고 있느냐의 차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 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자신을 향해서는 no, 하나님께는 Yes라는 자세로 살려고 노력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먼저 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려고 한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자기 부인하는 삶이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그래서 순종은 자기부인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2. 예수의 증인 되기 위한 두 번째는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이다.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라는 말씀이 언급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사실 본문의 구조는 그런 오해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고 있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다고 말씀하니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생각을 가질만하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가 생각하는 기도는 대부분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다. 즉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 받아내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서 기도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생각이고 수준이다 보니 함께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뒤에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령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신다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기도해서 성령을 받는다면 결국 성령은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성령이 오시는 대상이 결정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분명 성령이 말씀하는 것과 다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성령의 오심을 말하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얘기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은 단지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보다는 성도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신비한 힘과 능력이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늘의 일을 마음에 두고 생각할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 됨의 의미가 성령이 오심으로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있음을 뜻한다. 즉 성도 됨의 의미, 성도 되었다는 근거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성령을 받았느냐로 구분되어지는 것이지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또는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느냐라는 것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육신의 것으로 되어질 수 없는 것이 '성도'라는 존재이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을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의 사람이 되게 하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겠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은 자기들의 육신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이 오시기 전에 기도에 힘썼다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를 능히 알 수 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도 방법도 아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해 크게 오해한 것이며, 하나님을 우상과 같이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그 일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정 반대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나를 맡기는 것이 기도이다.

결론:

성도는 '기도의 사람'이다.

성도가 기도의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힘과 세상 것을 의지하지 않음을 말한다. 나의 나됨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지 내가 되고자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성령을 주시는 것도 성도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힘이 아닌 영으로 사는 사람이기에 성령이 오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이나, 예루살렘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썼다는 말씀은 모두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존재할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하시기 위해서다. 주님이 하신 일을 할 사람으로 세워진 것이다.

주님을 증거할 자로 부름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있어서 장애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옛사람이 나 자신이 주님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밖에 없다. 세상보다는 하늘의 일에 관심을 두게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 자기 일을 이루기 위한 자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이기에 성도는 자신을 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증인 된 사람이다. 이런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