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다시 오실 예수님 - 사도행전 1장 9-11절

차작가 2023. 11. 30. 12:15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절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11절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본문 해석:

1. 승천 하시기 전에 하신 일들에 대해서

헤어지기 전에 어떤 마음일까?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권능이었다. 이 땅에서 제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예수의 증인 된 삶인데 그 증인 된 삶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만 가능하다고 말씀 하셨다.

이런 말씀을 하신 후 제자들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2. 예수님이 승천 하신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것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엡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9절에서 (죽음에서 승리하여) 올라 가신 이유는 내려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 가셨다는 것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내려오신 목적은 8절에 처럼 죄와 사망에 사로 잡힌 자들을 해방시키고 즉, 인간들을 죄 에서 구원 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 가심으로 만물을 충만하게 하셨다. 아직도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온 세상을 다시 온전하게 회복(완성) 시키셨다.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기 위해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위로 올라가실 때 사망에 사로 잡혀 있던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선물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 땅 낮은 곳으로 오셔서 사탄과 싸우시고 승리하셔서 사탄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기 백성을 구출하여 사로잡으시고 그리스도의 선물에 참여하게 하셨다.

우리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사람들이지 더 이상 죄에도, 죄의 삯인 사망에서 사로잡혀 있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우리를 사탄이 다시금 사로잡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이고 율법에도 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들이고 각 사람 모두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한 선물을 받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셔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는 대면 하는 사람들이 한계가 있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점이 유익이 될 수 있다.

3. 천사가 하는 말 (10,11)

1)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1절에 보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에 대해 흰 옷 입은 두 사람, 즉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외치는 말이었다.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니, 하늘을 보고 있지 말고 다시 오실 예수님이 말씀한 삶을 가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곧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늘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성도라면, 하늘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재림의 삶이다. 비록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멀리 하늘에 계시지만 현제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곧 재림의 삶이며 동시에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는 것은, 다시 오심 즉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하늘로 가신 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세상에 다시 오실 때가 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 둘 필요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다시 오신다'라는 것이다.

2) 마가복음 13:32-37절에 보면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13: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13: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13: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성도의 삶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세상은 끝장이니까 세상일은 다 집어치우고 교회에 모여서 예배나 드리고 기도만 하면 된다고 여기십니까?

마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주인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가면서 문지기들에게 각각 권한을 주고 사무를 맡기며 깨어 있으라고 명한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주인이 맡긴 일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다. 과연 예수님의 재림이 확정된 세상의 현실에서 성도가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매일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예수님을 묵상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은 성도의 깨어 있음을 이런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가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고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한다. 그리고 집 주인이 언제 올지 혹 저물 때일지, 밤중에 인지, 닭 울 때 인지, 새벽 인지 너희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고 거듭 당부하신다.

그러면 주인으로부터 사무를 맡은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종들이 주인이 맡긴 일을 잊지 않았다면, 그리고 주인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주인이 올 때 가지 맡긴 일을 하면서 살 것이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만약 종들이 주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주인이 맡긴 일을 잊어버린 채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자기 일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즉 주인이 맡긴 사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깨어 있지 않고 잠들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때 믿으면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런 계산도 가능하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을 보며 그때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성도로 간주되어 구원 받지 않겠느냐는 아주 유치한 유아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자기 구원에 집착한 인간의 생각이다. 믿음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 구원에 맞추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죽는 순간에 예수 믿으면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재림의 시기에 관심을 두는 것도 자기 구원의 시각에서 재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내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가?’에 관심이 향하게 된다.

하지만 성도는 주인이 떠나면서 사무를 맡긴 종의 입장에 있다. 사무를 맡은 종으로서 필요한 것은 주인이 언제 오시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맡은 사무를 충실히 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종에게는 주인이 언제 오는가가 관심으로 등장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맡은 사무는 무엇일까? 행 1:7-9절을 보면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남기신 이 말씀이 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사무를 맡기는 내용과 같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셨다. 즉 타국으로 떠나셨다.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맡긴 사무, 즉 일은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가시지만, 곧 성령을 보내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이 맡은 사무는 제자들의 힘으로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사무이다. 하지만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맡은 일은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써 성령이 이루실 일임을 뜻한다. 제자들이 할 일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자기 인생의 길을 버린 채 다만 성령이 이끌어 가는 인생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 즉 사명이고, 오늘 성도의 사명이기도 하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실 때의 세상의 형편은 노아 때와 같다고 하셨다. 노아의 때는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홍수가 자신들을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물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되어서 멸망을 받은 것은 아니다. 노아도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점은 노아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인생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덮여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노아에게 인생의 전부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그 증거가 세상에는 쓸모가 없는 방주를 만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자신을 살리는 것은 방주이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삶의 문제가 아님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것으로 행복을 누리고자 했다. 이것이 노아와 세상 사람의 다른 점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일상생활 말고 다른 특별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도라고 해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즐거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깨어 있는 자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그러한 것들이 인생에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없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에 덮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를 구출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노아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 했던 것은 방주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방주를 만드는 것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이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은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것에 해당된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덮칠 때 나를 구출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이 맡긴 일을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곧 생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피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는 믿음은 세상의 마지막을 바라보지 않고는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미 말씀으로 확정된 마지막의 때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생명임을 믿고, 예수님의 의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세상은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것을 챙기며 살기에 바쁘다. 하지만 마지막 때를 생각하는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의가 존귀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사는 신앙은 하루하루 예수님이 언제 오실까 궁금해하면서 손꼽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언젠가는 오신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맡겨진 인생을 성도답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이다. 즉 증인의 본분을 다하며 살았는가를 심판하신다. 하늘로 가시면서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고,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고 권능을 주셨다면 다시 오셨을 때는 성령을 보내신 예수님의 의도에 복종하는 삶이었는가를 보시는 것은 자명하다. 깨어있는 삶이었는지 아니면 자는 삶이었는지가 주님이 오심으로 판명된다.

이것을 믿는 성도라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성도라면 이미 주님이 오셔서 나를 살피시고 계시는 삶이 되어져야 한다. 이것이 깨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특별한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없이 나 홀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내 앞에 버티고 서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증인으로 사는 것이며 재림을 믿는 삶이다.

4. 성도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것

대박 인생은 실제로 하늘로 올라 가신 예수님을 믿고 또 실제로 오실 것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다.

결론:

우리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에 있다. 증인으로 사는 것이 곧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의미이다.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가 이 땅에서 우리 개인을 위하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신앙이 우리의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성도는 이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믿음을 받았고 성령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이 일에 부지런하고 힘써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이 자리에 부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아래에 있다. 즉 예수님을 위한 삶이지 삶을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나중에 되어질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되어진 일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재림 신앙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