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에서 모세가 고별 설교를 한 뒤 죽고 드디어 여호수아서에서 요단강을 건넌다.
여호수아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이다.
여호수아의 원래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호세아이다.
호세아의 이름을 모세가 여호수아로 바꾸어 주었다.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부르면 예수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을 정복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약속의 성취에 관한 책이다.
여호수아서를 통해 여호와는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분임을 알려 주신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슷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면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가른다.
모세를 통해 문설주의 피를 바르면 죽음이 비켜 간 것처럼 라합은 붉은 줄을 성벽에 매달아 구원을 받는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는 반면 여호수아는 2명의 정탐꾼을 보낸다.
모세는 하나님을 붙타는 떨기나무에서 만났다면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장관 사자를 만난다.
모세는 10가지 재앙과 3가지의 기적을 보여 준 반면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총 13번 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순종했을 때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것처럼 여호스아는 아이성 점령 실패 후 중보기도를 한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 역사라고 불린다.
여호수아의 시대적 배경은 주전 15세기 말 내지 13세기로 보는 두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여호수아서 24장 29-33절에 근거하여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책이 완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주관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침략하게 하시고 그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데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
그 당시 바알 신을 섬기는 가나안 백성들의 음란한 문화는 고고학 학자들의 발견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가나안이 부패하고 그 죄가 심히 커서 하나님이 그 땅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로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가나안의 죄를 심판하고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의 목적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을 유지하여서 그 땅을 축복하길 원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은 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여호수아서에 잘 나타나 있는 거룩한 전쟁은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도는 것으로 여호와의 전쟁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의 승리는 말씀 순종에 달려 있다.
인간의 방법으로 군사력이나 무기에 있지 않고 오로지 말씀에 순종함으로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자 하나님은 절대로 재건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무너진 여리고성을 바라보며 죄에 대한 댓가가 멸망임을 보여주며 경고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나는 여호수아서를 평소에도 참 좋아한다.
오늘은 1장에서 10장을 묵상했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죽고 난 뒤 몇 가지 포인트를 묵상하며 읽었다.
모세가 죽고 난 뒤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1장의 대부분을 통해
"함께 하신다. 너를 떠나지 않는다. 버리지 않는다. 강하고 담대하라. 이 땅을 너희에게 차지하게 한다.
말씀을 지키면 평탄하게 된다." 이 말씀을 무엇보다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복 돋으시고 용기를 주신다.
그리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나세 반 지파는 그들이 약속한 대로 모두 무장하고 형제들보다 앞서 건너가서 전쟁을 돕는다.
이렇게 1장은 평탄하게 시작한다.
2장에서는 유명한 기생 라합 이야기가 나온다.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줌으로 모두 멸망하고만 여리고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인이다.
라합을 통해 그 가족과 친척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불태워졌을 때 그곳에서 살아나서 걸어 나온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이때 라합이 고백한 놀라운 말이 있다.
여리고성에 사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모세와 홍해가 갈라진 이야기와 아말렉 전쟁을 듣고 심히 두려워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주민들의 간담이 녹았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아를 찾은 것은 라합 뿐이었다.
여리고성을 도는 상상을 해보자.
그들이 매일 하루에 한 바퀴씩 돌 때 사람들은 성벽 위에서 두려움에 떨며 구경했을 것이다.
칼과 창을 들지 않았는데도 그 공포감은 대단했던 것 같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이 더 공포심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라합과 같이 정탐꾼을 숨겨준다든지 성 밖을 나온다든지 성벽을 타고 내려온다든지 백기를 드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들은 지킬게 많았고 라합은 지킬 게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와 그 가족들은 성벽에 거주하는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벌을 마땅히 받아도 될 정도인 여리고 백성들이었기에 아마 심판받기에 마땅하다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성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주신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그녀는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었다.
항아리에 먹을 양식이 풍부하고 금은보화가 있고 버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유물을 보면 성 안에는 물과 음식이 풍성했고 타락도 풍성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다는 가난한 심령이 중요함을 느꼈다.
그것이 유일하게 여리고성에서 살아남은 라합처럼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 모세도 그렇고 여호수아도 그렇고 시청각적인 교훈이 눈에 띄었다.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의 게임교육이 여호수아서에서 어떻게 하는가가 궁금했다.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이렇게 하라고 말만 했고 여호수아에서는 실제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전에 요단강에 세운 12개의 돌을 세우는 것도 참 재미있는 시청각 교육이다.
레위 지파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자 물이 갈라졌다.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 12개의 돌을 각 지파 별로 가져와서 길갈에 세우는 장면이 있다.
훗날 자손들이 이 돌 12개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3장 7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원히 기념이 되리라고 하라" 이렇게 시청각적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신 것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 축복과 저주 시청각 교육이 이뤄지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8장 33절에서 35절 말씀이다.
신명기 말씀처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절반은 그림신산에 절반은 에발산에 서있고
레위 사람 제사장이 궤의 좌우에 서서 율법책을 낭독하면 사람들이 "아멘"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곳에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35절에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이렇게 그 말씀이 이루어진다.
이 장관을 생각해 보면 산 위에서 모두 함께 "아멘" 하고 외치는 소리가 엄청나게 컸을 것 같다.
이스라엘의 지혜롭고 독특한 교육법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우리 가정은 매일 성격을 읽는다.
나는 매일 이렇게 묵상을 하며 기록하고 있고
남편과 애들은 성경통독 표에 따라 같은 말씀을 매일 읽고 카톡 방을 만들어 서로의 묵상하고 느낀 말씀을 나누고 있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은 남편이 매일 영적인 상태를 관찰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바르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매 주일 오후 5시에 화상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
돌아보면 모세의 시청각적인 교육도 어느 정도 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돌아보니 요단강의 12개의 돌을 세우는 이런 방법이나 모세의 OX 퀴즈 같은 방법도
우리 가정에 형편과 상황에 맞게 특별한 증거가 되는 것을 남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영적인 자녀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는 그 마음의 중심이 참 빛이 났다.
오늘 읽은 여호수와서의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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