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는 교회를 다닌다면 대부분 아는 스토리가 많이 담겨있는 책이다.
마치 아이들 동화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있다.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사는 삼손이고 그다음은 기드온 300용사 그리고 입다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드온 사사 이야기는 앞 1장에서 10장 묵상에서 했고 오늘은 입다와 삼손에 대해서 나누고 싶다.
11장 1절에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일단 1절에서 보면 입다는 서자이다.
정실부인과 아들들이 입다를 싫어해서 입다는 형제들을 피해서 돕 땅에서 살았다.
1절에서 "큰 용사였으니"라고 한 것으로 보아 크고 전쟁에 강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옛날 남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에서 덩치 크고 싸움 잘해 보이는 학생들 옆에는 항상 비슷한 불량스러운 학생들이 모여 있다.
마치 그것과 같이 입다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처하자 입다를 찾아왔고 입다에게 암몬 자손과 싸울 계획이 있으니 우리의 장관이 되어달라고 청했다.
7절에 보면 너희들은 나를 미워하더니 심지어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냈으면서 어려움을 당하니까 내게 왔느냐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다가 전쟁의 승리로 얻은 거라곤 무남독녀인 딸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이었다.
입다는 주위의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 잘못된 서원을 했고 자신의 무남독녀인 딸을 번제로 드리는 처참한 상황을 경험했다.
입다를 보면 인간적으로 너무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고
이복형제들에게 눈칫밥을 먹으려 살아온 입다가 입은 상한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이팠다.
누구나 입다를 기생이 낳은 아들이므로 손가락질을 하고 어디 마음 둘 곳이 없는 입다는 사람들에게 버려지고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입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과도 같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자기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그 상황에 세상의 무엇도 그를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그 삐뚤어진 입다가 치유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는 기간은 평화가 없었다.
1정에서 10장까지 나온 기드온이나 드보라나 옷니엘등이 사사로 있을 때는 항상 평화가 있었지만
입다 자체가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었기에 모든 것이 파괴였다.
그 와중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서 입다에게 왜 자신들을 불러서 전쟁에 함께 가지 아니했냐고 말하며
입다와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을 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의 지파가 다른 지파에 비해 크기 때문에 스스로 교만했다.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기드온에게도 똑같이 말했었다.
그러나 기드온은 우상을 찍어서 불태울 때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누구의 소행인지 캐물어서 기드온이 했다는 것을 알고
기드온의 아버지인 요아스에게 기드온을 끌어내라 하며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하스는 자신의 아들을 감싸 안았다.
그 성읍 사람들에게서 아버지가 기드온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입다에게는 그런 부모가 없었다.
그런 입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마음에 슬픔과 분노를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그들에게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주지 아니한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다"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에브라임은 기드온에게도 찾아가서 똑같은 행패를 부리며 마치 다 차려논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했고
지금 입다에게도 찾아와서 입다가 받은 공에 슬쩍 숟가락을 올리며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입다에게는 에브라임을 칠 명분이 생겼고 또 공의로 가장한 분노를 표출할 좋은 타겟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에브라임을 모두 전멸 시켰다.
12장 7절에 보면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6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에 장사되었더라"
기드온이 사사로 있을 때는 8장 28절에 보면 "기드온이 사는 40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입다가 사사로 있을 동안은 단 한순도 평안이 없었다.
물론 입다에게도 평안이 없었다.
입다처럼 어려운 환경에 산다고 해서 모두 입다와 같은 결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입다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입다 주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입다를 이해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저 입다가 용사였기에 단지 이용해 먹은 것이다.
번제로 드려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서원이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순종하는 딸을 보면 입다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그의 딸뿐이었다.
이 딸의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에게 가정 소중한 딸을 절대로 번제로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며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기드온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을 지혜롭게 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이 입다의 사건에서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오히려 더 불행 가운데 던져 버리는 이 당시 사회 문제가 느껴졌다.
하나님은 입다를 통해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사회의 잘못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보여주셨다.
현실에도 우리는 뉴스에서 입다의 사건들을 많이 보고 있다.
믿는 우리는 이런 사회의 어두운 것을 보고 느끼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입다의 잔혹사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면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임을 깊이 통감해야 함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삼손에 대해서 오늘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있었다.
삼손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아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다.
아기를 가지지 못하던 부부 사이에서 귀하게 자란 삼손은 나만의 추측이지만 너무 오냐오냐하게 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을 읽을 때 생각이 짧고 단순하고 즉흥적이고 분별력도 없고 한편으로는 순진하고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그런 성격으로 느껴졌다.
삼손과 들리라 사건은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이다.
들릴라가 삼손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세 번이나 물었지만 삼손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머리카락을 16장 17절에 보면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으니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니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전에는 삼손이 정확하게 자신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온 다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삼손은 진심으로 말했지만 정말 머리카락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면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 번이나 올무를 놓는다는 걸 분명히 눈치챘을기 때문이다.
삼손은 정확하게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몰랐지만 뭔가 머리카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15장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이렇듯 자신이 힘을 발휘할 때는 자기가 정확하게는 왜 힘이 나는지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해서 자신의 힘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카락이라고 들릴라에게 말할했던 것이다.
그러나 힘은 사라졌고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눈이 뽑히고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삼손은 눈을 보지 못하게 되자 깜깜한 가운데 갇혀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고
자신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물론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지만 이 머리카락이 힘을 내지는 못한다.
나는 늘 머리카락이 다시 자란다는 구절에서 함정에 빠졌다.
삼손의 힘은 여호와의 영이 아니라 머리카락에서 나왔고 머리카락이 다시 나기 시작하자 삼손의 힘이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만약 블레셋 사람들이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왔다고 정말 믿었다면 머리카락이 나면 다시 밀었어야 했다.
그들도 하나님의 영이 삼손을 떠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삼손은 눈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났고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결과로 삼손이 살아있을 때 불레셋 사람을 죽인 수 보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더 많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힘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빠지지 않고 새벽예배를 드린다든지 십일조를 드린다든지 선교를 하거나 선교사를 후원한다든지
또 목회를 한다든지 이것 자체가 우리의 힘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아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일하시고 내 안에 계심으로 우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오직 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열심으로 뭔가를 이룬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마치 머리카락이 힘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과 같다.
오늘 삼손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게 하신 것도 성령님이시다.
항상 무엇을 할 때 어디서로부터 나오는 힘인지 우린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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