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시편 81편부터 90편 묵상

차작가 2023. 9. 26. 12:53

오늘은 시편 81편에서 90편까지 묵상했다.

그중에 88편을 선택한 이유는 현재 나는 시편 88편의 저자처럼 죽음의 문턱에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 선택했다.

시편 88편은 극심한 질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 저자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시이다.

이 시에는 보통 시편에서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나 찬양의 맹세조차도 없이 고통과 고난의 소리만 생생하게 들리는 시이다.

그래서 이 시편은 초대교회에서 성금 요일에 그리스도의 기도로 읽히곤 했다.

구조적으로는 이 시는 4연으로 나누어진다.

시편 88편은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여기서 마스길은 교훈을 뜻한다.

또한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이다.

"마할랏르안놋은" 역경의 고통과 같은 느낌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이다.

서러움은 서러움으로 노래할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시편 88편은 믿음의 고백이나 찬양의 표현이나 서원이 담겨있지 않다.

저자는 울고 싶은 상황에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이다.

88: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88: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88: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88: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88:5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죽기 직전에 있는 시인은 "내 구원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시작한다.

이 시편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어두운 시이다.

시인은 능히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3절의 "생명"은 음부에 가깝고 사람들도 자신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로 생각하고

더 이상 소생할 힘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시인이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을 속히 살려 주셔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있다.

88: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88: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8: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88: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인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자신을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음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 마저도 마치 자신이 부정한 병에 걸린 것처럼 가증하게 여기고 떠났음을 말한다.

마치 갇혀서 나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했음을 말하며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한다.

88: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 하리이까 (셀라)

88: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88: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죽음에 가깝다고 탄식한 시인은 자신이 죽기 전에 구원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

기도의 내용은 죽은 자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으므로 죽기 전에 자신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인자하심"과 "성실하심"과 "기적"과 "공의로우심"이다.

죽음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되묻는다.

이러한 모든 수사의문문들은 죽기 전에 자신을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살아있는 자들에게 마음껏 찬양하게 해 달라는 간청이다.

88: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88: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88: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88: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88: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88: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앞에서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었던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간구한다.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자신의 기도가 아침에 하나님 앞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서 "아침"은 왕들이 주로 재판을 하던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들이 왕에게 역울함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하던 때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기도에 응답이 없으신 하나님께 왜 자신을 버리시며 얼굴을 숨기시는지를 물으며 탄식한다.

그 탄식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두렵게 하심"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15절의 "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라는 시인이 느낀 절망감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마저 자신을 떠나게 하심을 탄식하며

마지막 행을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라고 탄식하며 끝을 맺는다.

죽음만이 가득한 상황 속에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작년 9월 어느 날부터 시작된 말씀 묵상과 중보기도 시간은 이 저자와 같이 고통 가운데 있던 상황 속에 시작된 기도였다.

처음에는 나의 병을 위한 기도였지만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공감하게 되었고

주위에 중병으로 외로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나의 영도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가슴 아프게도 기도한 분 중에 천국에 가신 분도 계신다.

고통 가운데 있으면 찬양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놀랍게도 찬양을 하며 울 수 있었고 나의 가슴 깊이 있는 슬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었다.

이 시가 바로 죽음의 문턱에서 하는 찬양이다.

사람들은 병을 경험하지 못한면 이 서러움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서러움은 슬픔의 찬양을 할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시편이 말하듯 믿음의 고백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어떤 소원도 약속할 수 없다.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환자들은 깜깜한 항아리에 갇혀 있는 것만 같고

하나님께도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잊힌 존재와 같이 느끼게 된다.

이 저자는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찬양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 자신이 자신을 살려달라는 이유를 찾을 수 없자

그 절박한 마음에 내가 죽으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면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 않겠다며 묻고 있는 것이다.

탄식하며 드디어 그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는 저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하나님은 인자하셨지! 그리고 성실하셨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 또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이 있잖아?" 이것을 기억하며 간구하고 있다.

사람은 행복하고 문제가 없을 때 건강할 때는 자신이 누리는 삶이 얼마나 기적인지 깨닫지 못한다.

나처럼 아프면 매일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손 매일 젓가락질을 할 수 있는 손

찬양할 때 마음껏 찬양해도 어지럽지 않고 발작이 일어날 때 공포가 없는 세상, 이런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나는 아프고 나서야 내가 누리는 삶이 진정한 축복임을 알았다.

가장 흔한 산책할 수 있는 것 강아지에게 빗질 해주는 것 밥 먹고 설거지하는 것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이런 소중함을 몰랐다.

명품 백은 없어도 그만이다.

건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무가치한 것이다. 흔하게 생각하는 이런 일상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아플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동안 성실하게 나를 돌보심을 알게 되었다.

현재 여러분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고 함께 슬퍼해 줄 수 있고

진정으로 그들을 중보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 고난을 통해 가져온 축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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