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는 사도 바울에 의해 쓰였다.
로마서 내용에 따르면 바울은 여러 번 로마에 방문하기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방문을 준비시키고자 했다.
이 서신이 쓰일 당시에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의 끝 무렵에 들어설 때였다.
주후 57년에서 58년 경 고린도에서 로마서가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은 마케도냐와 아가야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 중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금 사역 중이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로마서 16장에 언급되어 있는 수많은 성도들의 이름은 직접 로마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곳 교회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방문이 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더디오를 통해 로마서를 작성하여 보내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로마서는 그가 로마교회에 방문하기에 앞서 그곳의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의도였다.
또한 방문 후에 계획하고 있었던 스페인 선교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려는 생각도 있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해 모금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방인이 다수였던 로마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이를 염두에 둔 듯 사도바울은 인종까지도 초월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한다.
로마서의 특징을 논하기 전에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은 "과연 누가 로마교회를 세웠는가?"라는 질문이다.
사도바울이 로마교회를 세우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료 하나가 있다.
바로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가 주후 49년에서 50년 글라우디오 황제 때 그리스도라 불리는 자의 선동으로 로마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을 로마 밖으로 축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기독교인 역사가의 기록은 폭동의 주동자를 예수그리스도로 오해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나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보다는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후 로마로 돌아와 세운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로마서 1장 12절에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피차 안일함을 얻으려 함이라"라는 표현에 나타나듯 로마서는
복음의 성격에 대한 거대한 논문과 같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서를 논문이라고 본다면 논문의 주제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라는 "이신칭의"일 것이다.
핵심 구절은 1장 17절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는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를 변화시킨 구절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 나타난 의로움, 믿음, 삶이라는 세 개의 핵심 주제는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로마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명확히 지적한다.
그것이 인간의 현재의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게 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되는 길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서신은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12장부터는 믿음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한마디로 의를 입은 자로 걸맞은 행함은 매일의 삶 속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삶과 분리된 교리는 존재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서 앞부분에서 의인이 믿음으로만 산다라는 말을 믿은 후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의미로 오해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의 뒷부분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이 예배임을 강조되어 있음을 말한다.
(성경 에센스 로마 서편 김윤희 교수 참조)
로마서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안타깝게도 나는 과거의 섬기는 교회의 한 장로님이 생각이 난다.
가슴 아픈 추억이지만 잘 지워지지 않는 나쁜 기억이다.
남편이 설교할 때 이 말씀을 전하자 자기는 동의할 수 없다고 설교 중에 말했던 기억이 난다.
장로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충격받은 예배시간이었다.
그분이 아무리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라 했지만 이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시 행함도 없었기에 그 발언은 굉장히 충격이었다.
바라건대 그분이 지금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삶에 나타내시며 사셨으면 한다.
오늘은 로마교회가 세워지고 글라디우스 황제가 즉위했을 때 교리 문제로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그것은 한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편은 아니라고 하며 서로 싸우는 소동이었다.
그래서 글라디우스는 이 모두를 추방해 버렸다.
그때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가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4대 황제인 글라디우스가 옹립되던 시점이었다.
이 황제는 신체적으로 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글라디우스는 멘탈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모든 정치를 할 때에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했었다.
그래서 이 소동을 양측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고 대수롭게 않게 모두 추방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도행전 18장 2절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그래서 로마교회 내에는 유대인들은 모두 떠나고 이방인 기독교인들만 남게 되었다.
이후 글라디우스가 죽고 난 후 새로운 왕이 유대인 추방법을 취소하자 다시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 오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서의 배경은 추방 당했다가 돌아온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남아있던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에 갈등에 관한 것을
바울이 듣고 편지를 쓴 것이 로마서이다.
1장 18절 이후부터는 바울이 남아있던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질책하는 말씀이 시작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방 신들을 섬겼고 동성애 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뿐만 아니라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죄 아래 자유함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므로 5장 1절에 보면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는 죄 앞에 자유함이 없으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5장 8절에 보면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화목해 되었다.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도 화목해해야 됨을 말씀으로 다시 일깨어 주셨다.
앞에 언급한 장로님을 용서하기가 참 힘들었다.
오늘 말씀으로 힘들지만 그분을 용서하고 죄 앞에 의인은 없으므로 나도 그분을 만날 수 없지만 화해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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