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묵상

손바닥 묵상 1 - 사무엘 하 18장에서 24장 묵상

차작가 2023. 9. 19. 12:30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궁이 함락을 당하고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옥상에 장막을 치고

다윗의 후궁들이 벌건 대낮에 농락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도 이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왜 다윗은 후궁만 남겨 뒀을까?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을 닫고 열지 않으면 난공불락인 성이라 토성을 쌓지 않는 한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왜 성문을 열어줬을까이다.

성안에 살던 사람들 중에서 열어줬다면 왜 그랬을까이다.

물론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니 하나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줄 알지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이곳에 나오는 열 명의 후궁과 대조되는 20장에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사건에 등장하는 한 여인이있다.

세바가 요압을 피해 도망하여 밷마아가 아벨로 도망하여 그곳의 모성 즉 주요성으로 도피하자

한 여인이 지혜롭게 세바의 머리를 성 밖으로 던져 그 성을 구하는 사건이다.

뭔가 이 여인들을 대조해서 기록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한 여인이 성전체를 구한 것은 그녀의 지혜 때문이다.

아직 완전히 묵상이 안 되어서 좀 더 공부해서 다음에 꼭 나누고 싶다.

오늘은 20장에서 세바를 쫓는 요압 장군에 대해서 나누고 싶다.

상남자 중에 상남자인 요압이라는 군사는 군대장관까지 역임한 다윗의 오른팔과 같은 장수이나

23장에 다윗의 용사 중에는 그 이름을 볼 수 없는 장군이며 다윗의 유언에서 요압이 편히 죽게 하지 마라라는 말에 의해서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행한 장수이다.

그 모든 시발점은 다윗의 말에 대한 불순종으로 시작되었다.

솔직히 나는 요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평생을 다윗 곁에서 조언도 하고 다윗이 이루고자 하는 왕국을 위해 헌신했지만 다윗은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를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삼고 자신의 동생 아비새를 죽인 아브넬을 평안히 가게 하는 다윗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넬을 찾아가 조용히 죽인다.

그리고 다윗에게 보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요압이 필요했기에 곁에 둔다.

가장 결정타였던 압살론을 죽이지 말라고 했으나 요압이 압살론을 죽이는 것으로 그들의 신뢰가 깨졌다.

그래서 다윗도 요압을 견제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압살론의 군 지휘관이었던 아마사를 다윗이 영입하여 세바의 반역을 소통할 계획을 아마사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요압이 죽인 압살론의 군대 지휘관을 아마사를 다윗의 군사로 삼아 중요한 임무인 발난 진압을 맡긴다는 것이다.

이젠 요압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요압은 아마사를 몰래 죽인다.

이렇게 요압은 세 번의 명령 불복종을 감행한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인 아비새와 함께 세바가 도주한 성에 가서 한 여인의 지혜로 쉽게 반역을 제압해서 공을 세운다.

그러나 요압이 세력이 커지는 것을 다윗은 반갑지만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점점 늙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20: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 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20:15 이에 그들이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한 지역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 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20:16 그 성읍에서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이 외쳐 이르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하건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이런 스토리를 보며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결정하는것은 반드시 결과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궁을 예루살렘 성에 남겨둔 다윗도 자신의 생각이었고

자신의 죄로 인해 강간당한 후궁들을 평생 별궁에 가두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그릇된 판단이 후궁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또 압살론을 충동질 시킨 후새도 다윗의 첩자였기 때문이다.

요압도 마찬가지이다.

군사에게는 명령 불복종만큼 큰 죄는 없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불복종을 합리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다윗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다윗의 생각을 들어 봐야 했다.

다윗은 어쩌면 베냐민 지파와 나누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세바의 반역도 다른 생각으로 접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사를 등용한 것도 나뉘었던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로 하기 위한 큰 그림일 수도 있다.

다윗도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했고 요압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요압은 다윗의 용사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마지막에 억울하게 다윗이 살인교사로 죽인 우리아의 이름도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하나님이 그 억울함을 아시고 명예롭게 올려주셨을 것이다.

오늘 요압을 보며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제일 중요한 것은 순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압같은 마음도 우리에게도 있다.

요압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것이다.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순종을 요구할때 우리가 취해야 할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비록 이해되진 않지만 예수님의 생각이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순종의 자리에 반드시 서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