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의 대화 - 누가복음 24장 13-35

차작가 2023. 10. 28. 13:08
출처: 구글이미지

13절 그 날에 그들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절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서론: 절망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님이 죽으신지 삼 일째 되는 날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그토록 기대했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열흘 전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실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시여~’라고 환호하며 영접했고 그 곁에 섰던 그들은 사람들의 환호에 이분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생각했고 감격의 기쁨을 느꼈다.

예수님께서 성전 마당을 어지럽히고 있던 환전상들과 비둘기, 양들을 파는 사람들을 둘러엎어 내어 쫓을 때, 바로 이것이 개혁의 시작이구나 생각했다. 예수님이 성난 음성으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고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소리치며 앞장서서 탁자를 둘로 엎고 비둘기들을 날려 보낼 때 그들은 마음껏 해방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마침내 빼앗겼던 성전을 되찾는 줄로만 생각했었다.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종교지도자들이 이제는 정리되고 새 날이 밝아 오는 줄로 알았다. 성전 개혁을 시작으로 예루살렘이 정화되고 이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이 건설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커다란 배신이었다. 예수를 따르던 한 제자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희생양처럼 한 마디 말도 없이 거짓 재판 자리에 잠시 섰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리고 말아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붉은 피를 쏟고 있을 때 제자들은 잠시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명한 현실이었다. 견딜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들의 모든 꿈이요 희망이었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죽어갔던 것이다. 그 위대한 분이 죽었는데 세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 갈 때 제자들은 터져 나오는 오열을 삼켜야만 했다.

우리의 꿈은 이렇게 끝나고야 마는가? 그토록 간절하게 희망한 자유와 평화는 이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버린 예루살렘!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등지기로 했다. 그로부터 사흘째 되던 날 예수님의 시체마저 없어져 버린 예루살렘! 이 두 제자가 거기 더 머물러 있을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늘도 버리고 땅도 버린 도시, 예루살렘을 등지고 그들은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삶의 의미도, 목적도, 수단도 모두 잃어버린 채 그들은 빈 껍질이 되어 무겁기만 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단지 백일몽에 불과 한 것인가? 이렇게 다시 한번 우리의 꿈은 짓밟혀야 하는 것인가?

바로 그때 그런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 예수님은 절망과 허무의 도상에서 미리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기다리고 있었을까?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려고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구절을 묵상할 때 우리가 잘 아는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가 생각난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다. 자기 인생을 추억해 보니 그때는 자기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섭섭한 마음이 든 그는 주님께 물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늘 저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당신은 어디 계셨나요?”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자녀야, 나는 너를 결코 버려둔 적이 없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에 네가 보았던 그 발자국은 힘들어하던 너를 업고 걸었던 바로 내 발자국이었단다.”

고통의 순간 주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 가장 가까이 계신다. 최근 <모래 위의 발자국> 업그레이드 버전이 나왔다.

그 사람이 다시 꿈속에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게 되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 발자국은 여전히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틀림없는 예수님의 발자국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발자국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예수님, 정말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군요. 죄송해요.”

예수님은 “그래 그때는 정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지!” 하고 추억에 잠긴 듯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어진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더 엉망이 된 두 사람의 발자국이었다.

“이건 왜 그런가요?”

그러자 예수님이 신이 난 듯 대답하셨다.

“자녀야, 네가 기억 못 하는구나. 그때는 우리가 함께 춤을 춰서 그렇단다.”

우리 친구 되신 주님은 우리 고통의 순간뿐만 아니라 기쁨의 순간에도 함께 하신다.

15절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절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 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절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고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한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 오

22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절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절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절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 여

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1.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먼저 물어보신다.

‘걸어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근데 당신들의 얼굴 표정이 영 아닌데 왜 그리 침통해 보입니까?’

제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슬픈 얼굴을 하면서 글로바라는 제자가 입을 열어 말한다.

‘보아하니 당신도 우리처럼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왜 우리가 이토록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요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로 모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모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다른 제자가 말한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얘깁니다.

2.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한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지요. 예루살렘은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하나님도 성전에서 떠난 지 오래요’

3. 실망과 회의에 빠져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미련한 자들아’ stupid란 뜻이 아니다. 약하고 분별력이 없는 자라는 의미에서 ‘미련한 자’라고 사랑으로 꾸짖으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보여줬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위로까지도 포기하고 슬퍼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기를 더디 하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선지자들의 말 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것에 대해 책망하신 것이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만일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귀중하게 여겨 명심하고 있었더라면,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확신하듯이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확신했을 것이다.

4. 우리가 조금만 더 성경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섭리를 알고 있다면, 그 예언들이 성취되는 사건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26절처럼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그렇게도 걸림돌이 되었고 그 영광을 믿지 못하게 했던 그분의 고난이 오히려 그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로는 그 영광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아야 했다.

메시아는 먼저 고난을 받으셔야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증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은 제자들의 기대를 파멸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의 진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27절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절 그들이 가는 마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갈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 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5.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메시아에 대해 말하고 있는 모든 구약의 말씀들

*구약 최초의 영적인 기록자 모세의 글인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역사적인 기록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모든 제사 의식과 희생제물, 모든 예식과 상징

*동물의 제사 (피 흘림)

* 표적들: 므리바에서 반석을 침으로 물이 나옴.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 시라

* 모든 선지자들을 통한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과 약속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그리고 모든 시편 기자들의 영감에 이르기까지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그 모든 내용들이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또한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는지를 자세하게 풀이하여 설명해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이 받으신 고난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다.

6. 모든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된 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깔려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이라는 광야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다. 구역의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들 나름대로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 깊은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경을 깊이 설명해 주는 동안 어느덧 엠마오 근처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7.24: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4: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두 사람은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된 후 그분과 이야기하기 시작 한때부터의 일들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말씀하여 주실 때에 그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 때문이었던 것을 알았다. 그들이 살아온 동안 그처럼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불속에 던져진 것처럼 뜨거웠고,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함께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고, 그들의 마음속에 경건하고 간절한 사랑의 불이 붙어졌던 것이다. 그 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느껴졌던 뜨거움이었다. 하나님 말씀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제자들은 저녁노을에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내려갔으나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주님이 살아계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그 사실을 아직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주님의 살아계신다는 것만은 이제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해함으로써 새 빛, 새 깨달음, 새 희망, 새 믿음, 새로운 세계가 열려 기쁨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새벽길을 달음질쳐 갔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소리 높여 증거했다. 십자가로 낙망했던 제자들이 똑같은 십자가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줄거리 요약:

예수님이 죽으신지 삼 일째 되는 날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시여~" 하고 입성할 때는 예수님이 앞으로 개혁하실 거라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지만 처참하게 온몸에 피를 흘린 체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리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희망하던 자유와 평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절망 가운데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가가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물어보신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걸음을 멈추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사흘째에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천사를 통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게 된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 또한 무덤에 가 보았어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한다. 실망과 낙심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미련한 자들아" 하며 꾸짖으시며 책망하신다. 그러시며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이 말씀한 예언들이 성취됨을 자세히 설명하시며 일깨어 주신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숙소에 머무시며 음식을 먹을 때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이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눈이 밝아져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

결론:

제자들은 메시아가 오면 로마의 속국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제는 세상에서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세상의 그 어떤 사람과 민족들 보다 더 우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희망으로 예수를 따랐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겐 십자가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죽어버린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였다. 일장춘몽에 그쳐버린 예수님을 따랐던 지난 몇 년이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을까? 과연 그들에게 있어서 지난 몇 년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절망으로 가득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실의에 빠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한 회복을 이루게 하신다. 아무도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절망감을 위로할 수 없던 때에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힘과 소망을 주신다.

예수를 믿고 그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간혹 절망과 실의에 빠질 때가 있다. 내가 예수를 잘 믿고는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든 상황에 예수님은 과연 나의 고통을 아시 긴하시나? 이런 절망감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럴 때일수록 오늘 본문의 두 제자가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의 제자들처럼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두 제자들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들의 마음이 뜨거운 체험을 한 것이다. 예수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이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이요 소망이 있게 하신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지금 실의에 빠지고 절망하고 있다면 바로 이때가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