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강도들과의 대화 - 누가복음 23장 39-43

차작가 2023. 10. 29. 10:15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절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인류의 문명은 발견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는 눈부신 발견들이 많이 있었다.

전기의 발견이라든가 아메리카 발견이라든가 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큰 발견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발견 중 최대의 발견은 하나님의 발견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발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견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관통하는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의 발견이 인간 생활에 큰 번영을 가져왔듯이 영적인 발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견은 우리의 영적 세계에 큰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견이란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발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오묘한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 요한, 바울 등은 분명히 십자가의 발견자들이다.

그러나 최초의 발견자는 훨씬 이전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같이 매달렸던 행악자 강도들이었다.

십자가는 그것을 함께 지는 자에게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해서 십자가의 발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갈보리 산 위에 3개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운데 서 있고 그 좌우에 두 강도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

한 강도는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는 남들이 그리스도라고 부르던 예수님을 향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너 자신과 우리를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비방하며 울분과 절망의 소리를 내뱉었다.

예수님 곁에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진 다른 강도는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예수님의 편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 본질을 발견하고, 그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자기 자신을 맡겼다. 그런 사람이 십자가의 발견자요,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동일한 십자가 발견의 원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분과 함께 몸소 십자가를 진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의 피 한 방울도 흘린 일이 없는 자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다.

회개한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다. 그가 어떤 악한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십자가 처형을 당할 정도로 악한 일을 했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처음부터 그는 예수님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하지 않으려고 회를 내며 반항하지도 않으시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잠잠한 어린 양처럼 입을 열지 않으시고 그 고통을 당하시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분이 하시는 놀라운 말씀을 꼭 한번 들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마 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신 그분 자신의 교훈의 실천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이미 예언(사 53:12) 된 죄인을 위한 중보자의 기도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인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 말씀이 그 행악자에게 큰 충격을 주고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의 처음에는 다른 행악자와 함께 예수님을 욕하고 비방했다 (마 27:44).

그러나 아무런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더욱이 그 극심한 고통의 한가운데서 우주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의 죄도 용서해 줄 것을 아버지께 간구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분의 십자가에서 인류의 무서운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이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지금 여기 죽어가는 이 행악자 앞에 어떤 수단으로서도 노하게 만들 수 없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 있었다.

갖은 조롱과 멸시와 굴욕을 당하면서도, 매를 맞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가시로 엮은 가시관으로 머리를 내리 찔려도 그리고 손과 발에 못 박히어도 한마디 거친 말이나 원망하며 미워하는 말도 성나게도 할 수 없는 예수님이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본 강도는 또한 자기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얼굴과 눈빛에서 지극한 자비와 동정을 보았다. 예수님은 지금 극도에 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원수에 대한 원한의 소리도 자기의 고통을 호소하는 비애의 소리도 내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얼굴에는 오직 원수들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동정과 연민만이 가득 차 있었다.

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죽음이란 고통이요 절망인데 그런 고통과 절망과는 상관없는 듯한 동정과 사랑으로 성화된 죽음을 예수님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켜보았던 한 백부장과 그와 함께 그분의 십자가를 지키던 사람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눅 23:47)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같은 고백을 예수님 옆에서 그 십자가를 지켜본 강도도 마음으로 고백했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한 강도는 자기가 매달린 자기 십자가 위에서, 자기 옆에 말없이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볼 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발견했다. 그래서 옆에서 비방하고 있는 다른 강도에게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심한 강도는 세 십자가 중에 두 십자가는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해 응당히 받아야 할 죗값으로 서 있는 것이지만 그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십자가에는 아무 죄도 없으신 오직 의로운 분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시는 말과 행위를 보고 비록 그분이 정죄를 받고 자기들과 같이 가장 악한 범죄자처럼 취급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것들로서 옳지 않은 그릇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분의 무죄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의로운 십자가를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새로운 차원의 죄인인 자기를 발견했다.

땅을 볼 때에는 억울한 십자가였지만 자기가 의로운 신 분의 십자가와 같이 갈보리 언덕에 세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견딜 수 없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항하는 다른 강도를 향해, 왜 마땅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죄에 해당하는 보응을 받아 마땅하지 않는가라고 꾸짖었다. 그것은 완전한 회개였다. 회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변화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족을 멸시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보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고, 자기 죄를 보게 되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동족에 대한 자세가 바뀌어 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죄 없고 의로우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추어진 인간 본래의 죄를 자각하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은 예수님의 무죄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이제 생의 종말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기고 싶은 마음의 고백이기도 했다.

이 의로우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는 행악자는 그의 양심에 강한 찔림을 받았다. 그분의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본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내가 왜 죄인인가고 항변하던 그도, 이토록 의로우심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내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했을 때 그 회개를 통하여 그의 마음속에는 그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싶은 구원의 그리스도가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 향한 기도로 표현되었다. 42절처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아마도 이전에는 이런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온 영혼을 쏟고 자기 전 인격을 총 집결하여 주님께 기도드렸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큰 소리로 하늘 보좌를 향해 중보의 호소를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에게 그 순간 영원에 대해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는 그 순간 지금 자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세상 너머에 다른 영역의 세계가 있다는 확신이 왔으며 현재의 이 현실을 초월하여 펼쳐 있는 영원한 세계를 보는 영적인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 영원한 세계에서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강도의 기도는 바로 자기 옆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같은 행악자로 취급되어 그렇게 형벌을 당하고 있지만

그분은 이 생명이 끝난 후에 있을 저 나라의 주인으로 그 나라의 통치권을 소유하신 왕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을 인정한 기도였다.

그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써 붙여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단순히 쓰여진 글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예수님이 외관상으로는 로마의 십자가형에 처해져서 패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분의 왕권으로 옮겨가는데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확신했던 것이다.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상처의 아픔은 극에 달한 예수님께서는 이 회개한 죄인의 기도를 들었을 때 모든 고통을 잊으시고 기뻐하셨다. 그야말로 이 순간 예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곧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롭다 하시고 자기 나라로 영접해 주셨다.

낙원이란 히브리인들이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떠나 간 의로운 영혼들이 머물러 있는 영역으로 믿고 있던 곳으로서 에덴동산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낙원’, 기쁨의 동산이다.

우리의 최초의 조상의 범한 죄로 인해 상실되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것이 회복된, 더욱이 세상적인 기쁨이 아닌 하늘의 기쁨이 충만한 영역이며, 그리스도는 그곳의 왕의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곳은 죽은 나사로가 죽은 뒤 그곳에서 위로를 받은 곳이다. (누가복음 16:25). 신자들의 영혼은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즉시 그곳에서 기쁨과 행복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고후 5:1)

이러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쳐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치매 물이 솟아 나와 온 회중과 짐승이 마시고 소생하였던 것처럼, 로마의 한 병정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에 생명의 물과 피가 한없이 흘러나와 세계 만민이 이를 마시고 소생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누구나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면 그분의 의를 자기 의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은 바울의 신학이 아니다. 교리도 아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아무리 중한 죄라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우러러보면서, 죄 깊은 내 모습을 보고 진정으로 가슴 아프게 느끼면서 ‘내가 어찌할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상한 심령을 예수님의 피에 적시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의요 다함이 없는 영원한 생명 그것이 곧 십자가로써 주어지는 구원이다.

이 구원을 받는 데는 회개와 믿음 이외에 더 첨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행악자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의식을 해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또 어떤 선행이나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에 대한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죄가 많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할 죄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두 행악자의 복판에 서 있다. 아니 죄악으로 꽉 차있는 이 세상 한복판에 서있다.

이제 그것을 발견하는 길은 이 강도가 섰던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편에서,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럴 때 나를 위해 그곳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게 된다. 허물과 죄로 얼룩진 나 자신이 보게 된다. 그리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고 싶은 그리스도가 보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 오길 바란다.

줄거리 요약: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라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내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외치는 군중 속에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곤 예수님을 두 재수와 함께 해골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두 행악자는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못 박혀 있었다.

그중 한 행학자는 예수님을 비방하며 "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지만 이 사람은 행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하며 예수님께 간절히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한다.

예수님은 그 회개하는 행학자에게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고 말씀하신다.

결론: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과연 우리는 십자가를 얼마나 알까? 십자가에 대해서 성경에서 가장 잘 알게 해 주는 사건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옆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들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지금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사도 바울보다도 십자가에 대해 더 잘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 한 명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 가장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구원을 얻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구원받은 강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되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순간보다도 가장 기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은 십자가를 바로 알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같이 지고 갈 때야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주시거나 그 고통을 잊지 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생활할 때 진정으로 날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잊지 않고 살 수 있다. 또한 나 자신이 마땅히 죽어야 할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은 구원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