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바울과의 대화

차작가 2023. 11. 1. 13:03

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18: 사울, 바울 (사도행전 9:1-20)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절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의 회심은 9, 22, 26장에 세 번 기록되어 있다.

1. 사도 바울에 대해서

1)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파한 위대한 개척 전도자

2) 구원의 복음을 체계화한 대 신학자로서 교회 역사상 가장 빛나는 존재

3) 3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빌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둘째, 아덴 다음의 제2의 교육 중심지였던 로마의 자유 시인 길리기야 주의 수도 다소 (행22:3-길리기아 다소.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에서 나서 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유대인이면서 헬라의 정신 형성을 할 수 있었다

다소: 이스라엘 북부 지역. 시리아 접경. 당시 3대 대학(아덴, 알렉산드리아, 다소) 중 하나가 다소에 있었음.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처럼) 교육의 도시.

셋째,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로마인이라는 것. 히브리 이름인 사울과 로마인의 이름인 바울이라는 두 이름을 가진 사람. 또 유대교 중에서 정통 바리새파에 속해있었음. 당시 학문과 인격에 있어서 뛰어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 (22:3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가 30대. 열성적인 유대 랍비였다.

2. 기독교인에 대한 사울의 생각

1) 스데반을 위시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사울에게는 ‘모세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었다.

2)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모두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3)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철저한 적개심을 갖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근절시키려고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살고 있었다.

4) 이처럼 그의 양심이 잘못된 선입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따라서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5) 그리하여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론하는 스데반을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일 때에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겼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지도자로서 앞장섰던 것이다.

6)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8:3 사울이 교회를 전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교들에 대한 핍박은 스데반의 살해로써 만족하지 않고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외국의 도시들로 파급되었다. 사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극심한 적의를 품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여 예수의 도를 쫓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증오심으로 불타면서 다메섹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시라아의 수도 다메섹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생전에 그분의 교훈을 듣고 또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핍박을 피하여 그 손으로 흩어져 간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회심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또한 진정으로 회심한 자는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3. 회심의 첫 단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 주시는 것이다.

바울 일행이 다메섹 가까이 당도했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4절) 그 빛은 정오의 햇빛 광채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이었다. (행 26:13) 그 빛은 갑작스럽게 사울과 그 일행을 비추었다.

그러자 바울은 땅에 엎드려졌다. (4절) 그리고 함께 가던 사람들도 모두 엎드려졌다. 바울은 갈 길을 저지 당하고 땅바닥에 엎드려진 채 한 음성을 들었다.

4절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핍박) 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이었다. 그는 하늘로부터의 빛을 보았을 뿐 만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음성도 들었다. 그 빛과 소리는 분명히 주관적인 환상을 아니었다. 왜냐면 함께 간 사람들도 그 빛을 보았고 소리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소리를 분별할 수 없었고 바울만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위대한 사도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땅에 엎드려져야 했다. 가장 영예로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택하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가장 낮추시어 겸손한 상태로 만드신다.

바울과 같은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만나 주신다. 직접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접적으로 만난다.

사람을 통해서. 책을 혹은 매스컴을 통해서. 왜? 사람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주도권을 말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영원하지 않는 것(돈, 건강)만 찾는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부르시는데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를 아주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다. 혹시 예수를 아직 믿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 있는 것 만이라도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도권을 느껴야 한다.

4절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4. 회심의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4절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핍박)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두 번 연이여 부르신 것은 예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그가 새롭게 되기를 바라시는 따뜻한 배려를 가지고 계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에 대한 책망을 의미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핍박) 하느냐?’ 바울은 예수께 큰 죄를 범한 죄인임을 알아야 했다. 그 죄란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이다.

그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했다. 그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개방적인 학문과 훌륭한 소양과 그리고 풍부한 성경의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핍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하다. 그리고 그가 미워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안 했는데 아니 그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또다시 그분을 핍박해야 하는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당하게 대하고 괴롭혀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런 그를 책망하며 그에게 호소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를 박해하는 것이 잘한 일인 줄 알았는데 죄였음을 깨달았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이 박해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자였는데 그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박해 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이심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에베소서 교회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옙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 주시니라 )

사울아 너의 문제는 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어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상관없다.

예수를 모르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5. 회심의 세 번째 단계는 깨달은 죄에 대한 회개이다.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이런 예수님의 호소에 바울은 5절에서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죄인 됨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를 향한 호소에 직접 답변을 하지 못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신다면 우리는 만의 하나라도 답변할 수 없다. 특히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핍박한 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다. 죄가 강력하게 양심에 비추어질 때 죄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양심을 찌를 때 모든 변명과 자기 정당화는 잠잠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책망하시는 분의 이름을 알기를 원했다. 바울은 그를 비추는 빛을 보고 그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을 때에 그것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확신하고 경외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이 빛 가운데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기를 원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즉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답변하셨다. 물론 바울은 그 이름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항상 저항감이 있었다. 이제 그는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핍박하고 있는 그분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은 그의 마음을 산산이 조각 내게 하는 선포의 말이었다. 그것은 지금 자기를 사로잡고 계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그분이라는 선언이었다. 바울은 지금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분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또한 비록 알지 못하여 그분을 핍박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순간 아마도 그의 가슴속에 스데반의 일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는 스데반이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가 메시아, 그리 시도 이 신 것을 논리 정연하고 당당하게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보이는 스데반의 얼굴도 보았다. 스대반이 죽어가면서 자기에게 돌 던지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도 들었다. 틀림없이 그는 스데반에게서 본 것과 들은 것들로 인해 그의 마음속 갚은 곳에서 커다란 충격과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 죄의식을 억누르기 위해 대제사장에게로 가서 위임장을 받아가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 오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다메섹으로 출발할 처음부터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바울 자신이 후에 아그립바왕 앞에서 이때 광경을 회상하며 간중하면서 예수님이 ‘가시 채 (소가 자기를 모는 막대기에 대항하는 것을 말함. 대항하면 할수록 더 아픔만 있는 것이다)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26:16)고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이때의 그의 마음 상태를 분명히 나타내 주는 말씀이며 그분은 자기의 그런 마음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핍박한다는 것은 마치 가시 돋친 채찍에 뒷발질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저항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은 일이요 불합리한 일이요 악한 일이요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파멸이 초래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는 예수님 앞에 바울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6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서있더라

8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절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0절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절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6. 이렇게 회심한 자는 어떻게 삶이 변할 수 있을까?

그 첫째는 헌신이다.

본문 6절에서는 없지만, 22:10절에는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고 있다. 날마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떨고 있는 바울에게 6절처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앞으로 행할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다. 예수께서 다만 그분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그리고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을 뿐, 그 나머지의 일은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통해 바울에게 고하게 하셨다.

그것으로써 충분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가 무엇임을 알지 못했고, 그리고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본 환상이 그를 약하게 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떴으나 시력을 잃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때 번쩍이던 빛이 그의 눈에 충격을 주어 눈을 어둡게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다 시력을 잃었을 것이다. 그의 눈만이 시력을 잃은 것은 그가 그때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의 형상도 보았던 것이다.

바울은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의 옥에 넣으려던 그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다메섹으로 끌려갔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그동안에 있었던 현상들의 뜻에 숙고하며 자신의 영적 상태에만 관심을 가지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경건한 제자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어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절)고 말할 때에 바울의 눈에서 바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하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주어 성령으로 충만케 하였다. 아마도 그 순간 바울은 자기가 그토록 박해하는 그분의 제자가 자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원수도 사랑하며 ‘형제 사울아’하는 그 손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예수님 앞에 엎드려졌던 그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일어나 전 세계에의 사도로서 세움을 받았다.

7. 이렇게 회심한 자는 어떻게 삶이 변할 수 있을까요?

그 두 번째가 복음 전파이다.

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그는 회심한 후 곧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며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회심은 동시에 사도로서의 소명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사도의 직무는 그가 목격한 사실과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내 보이신 부활의 사실과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오묘한 주의 계시를 증거하는 일이었다.

줄거리 요약: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모두 용서할 수 없는 범죄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 대해 철저한 적개심을 갖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품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근절시키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론하는 스데반을 예수살렘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일 때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 여겼고 그 일에 지도자로서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이 날도 사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극심한 적의를 품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공문을 청하고 예수의 도를 쫓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증오심으로 불타서 다메섹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울 일행이 다메섹 가까이 당도했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그 빛은 정오의 햇빛 광채보다 훨씬 더 밝은 빛이었다. 그러자 바울은 땅에 엎드려졌다. 그리고 함께 가던 사람들도 모두 엎드려졌다. 바울은 땅바닥에 엎드려진 채 한 음성을 들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이었다. 그 소리는 오로지 바울만 들렸다.

예수님의 음성에 "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답변하셨다.

그는 지금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핍박하는 예수님인 걸 들었을 때 그 마음속은 산산 조각이 났다.

그것은 지금 자기를 사로잡고 계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 분이시며 그분의 제자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그분이라는 선언이었다. 바울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분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비록 알지 못하여 그분을 핍박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뒤 바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해 사람들의 손을 의지해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의 환상 중에 예수님은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 하셨다. 아나니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하자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주님은 사울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바울로서의 삶의 사명을 주신 것이다.

결론:

예수님 당시 사울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누구보다 율법에 정통했었고 메시야관에 대해선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예수를 따른다는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이단에 불과했고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잘못된 확신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주는 경고의 길일 있다. 잘못된 확신으로 살아가는 사울에게 예수님은 직접 나타나셔서 사울이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영광되는 일인 알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핍박하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사울이 비록 잘못된 확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길을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에 있던 사람을 하나님의 맡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우리 역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가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다. 아직도 잘못된 확신과 신념으로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분이 있다면 바울이 저항 없는 빛을 만난 것처럼 되신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